그대와 나

여기서 그대는 바로 당신입니다.

by 아마추어 진화기

(애리조나 saguaro 선인장 출처:shutterstock)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애리조나 피닉스에 잠시 방문한 적이 있었다. 특별히 여행을 계획하고 간 것도 아니기에 사전에 애리조나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챙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항에 도착함과 동시에 그 어떤 존재로부터의 격한 환영으로, 잠시 말문이 막혔던 기억이 있다. 선인장.. 애리조나는 사막 지형으로 유명하고 사막하면 선인장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눈앞에 대면한 선인장의 크기에 한번, 처음 발견한 장소가 공항이었다는 생소함에 또 한번, 그 첫인상은 깊게 각인되었다. 그리고 차를 몰고 공항 밖을 나서면서 그 각인은 더 진해졌다. 수풀이 우거진 산도 익숙하고 헐벗은 흙 산도 낯설지 않다. 능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산 위로 사람 키보다 훨씬 큰 선인장들이 그 하늘과 공백과 바람을 공유하며 정지해 있는 장면이란, 아주 진부하게 표현하자면 나에게 찐득한 영감을 주었다.



나 역시 태어나 보니 당신처럼 사람이었습니다.



그 순간 사람이 생각났다. 사람 군상이 떠올랐다. 제각기 다른 방향을 응시하고, 홀로 서 있는 존재들. 그들 중 누군가는 가파른 능선을 쉽게 오르고, 누군가는 또 어렵게 내려가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수수께끼처럼 마주한 첫 인간, 바로 나 자신을 이해해야만 내가 살 수 있겠다고 느꼈던 순간들도 스쳤다. 그 나름의 고군분투가 참으로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그 당시에는 무언가 비밀스러운 외로움으로 똘똘 뭉쳐진 돌멩이가 되어 약해진 마음 속으로 내 던져지기도 했다.


그러서인지는 몰라도 일찍부터 심리 서적을 뒤적거렸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훨씬 이전부터 부부상담과 아이 양육에 관한 TV 프로를 찾아봤다. 어둡고 침울한 사연자의 표정이 프로그램 후반에는 엷은 미소와 웃음을 보이는 그 한 시간의 카타르시스는 특별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안에서 나름의 어떤 공통된 흐름들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많은 사연들, 각기 다른 얼굴과 목소리에 결이 다른 한숨과 눈물이 묻어있지만, 자세히 들으면 모두 비슷한 상황으로 설명이 되는 듯했다. '나를 조금 더 사랑해 주고 안아달라'는 말을 꾸역꾸역 안으로만 삼키고, 그 축적된 침묵 때문에 상대의 어떠한 외침도 들을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신기하리만큼, 따뜻하게 먼저 상처를 보듬고 사과와 고마움을 나누는 것 만이 그 목구멍과 귀를 다시 울리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많은 사연들을 녹여낸 후 하나의 결정처럼 떠올랐다.



"나는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는 방법도 잘 모릅니다."

-상담 프로그램에서 많이 듣는 말이다.-



특히 아이들이 상처로 굳어진 마음을 조금씩 열어 보일라치면 숙연한 마음마저 든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고 또 원하고 있는지를 그 작은 입으로 울먹이며 고백하는 순간에, 나는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낀다. 인간이 사랑으로 얼마나 강해지고 치유받을 수 있는지, 반대로 사랑이 비어버린 그 자리를 어떻게 분노와 불신이 대신 채워가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가시 돋친 선인장처럼 혼로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지만, 사랑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임을 안다면, 사막에서도 그리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다. 한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는 때에 인간을 향한 애정을 간직하는 것만큼 빛나는 밤하늘의 별도 없을 것 같다.


살다 보면 혼란과 눈물, 외로움과 분노의 날들도 있겠지만 이거 하나만은 기억해 주길 바란다.

너는 받은 사랑도 줄 수 있는 사랑도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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