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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소중함을 노래한 시인- 정현종

by 다담


삭막한 도시에서 속도전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네는 여차하면 계절을 잊고 산다. 체감으로 느끼는 계절은 항상 늦다.

교실이든 실내 어디든 아직 에어컨을 작동해야 하는 더위를 느끼다가 하루 아침새 선선한 공기에 몸을 움츠리며 '가을이구나' 하늘을 본다.

이미 높푸른 하늘은 지구와 더 맑게 멀어져 있고

가로수 은행은 군데군데 노란빛이 돈다. 공기 속에 느껴지는 갈색 가을향이 그제사 폐를 자극한다.

자연의 순리로 계절을 감각하기보다는 디지털 달력 숫자로만 살아온 세월이 넘 길다. 내 몸이 솔직하게 계절을 느끼기보다는 매체 속 떠도는 정보들이 먼저 계절을 인식시켜 온 것이다.


이런 도시 인생에 그나마 계절의 변화를 먼저 알려주고, 따스한 희망과 위로를 해 주는 것이 있다. 벌써 30년의 역사를 지닌 교보문고 본사 외벽에 내걸린 광화문 글판이다.


1939년 서울 출생의 정현종 시인은 광화문 글판에 네 차례나 선정된 만큼 명실공히 스타시인이다. 게다가 가장 사랑받은 글판 조사에서 1위 나태주 시인의 '풀꽃'에 이어 2위를 차지한 바도 있으니 그 인기는 증명된 셈이다.

그의 지금까지 선정된 글판을 살펴보자.


2005 봄 -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2008 겨울 - 아침

2011 여름 - 방문객

2019 봄 -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철학과 출신인 정현종 시인의 시는 아름다운 언어로 전달하는 철학이다. 그의 두 줄 짧은 시로 전달하는 내용은 너무나 넓고 광대하여 경외심마저 든다. 정현종 시인의 사유 깃든 시여행 도서 시리즈를 보아도 그의 철학적 깊이를 알 수 있다. 릴케와 네루다와 로르카 시에 대한 번역과 해설을 읽다 보면 그들의 시에 대한 이해는 물론 정현종 시인에 대한 무한 존경과 친밀함을 알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섬-


개개 사람이 섬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은 무엇일까. 너와 내가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아닐까. 그냥 두면 버려진 무인도가 될 수도 있으나 너와 내가 만나 가꾼다면 지상낙원이 될 수도 있는 섬. 그러나 우리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면 너와 나 사이엔 망망대해 바다라는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 짧으나 참깊다.

글판에 짧게 올라온 그의 시들은 모두가 유명하여 널리 알려진 애송시들이나, 또 그러한 만큼 두고두고 읽어도 좋다.

다시 감상해 보자~(굵은 서체가 글판 선정 부분)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 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 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 후회없는 삶을 살 수는 있을까...

지나보니 지난 선택들이 최선이었다 한들 가지 못한 길이, 손틈새 놓쳐버린 것들이 또 그렇게 아쉽다. 그러하니 아직 남은 날들은 내 열심으로 꽃 피우기 위해 오늘을 살아내는거지.....


아침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있는 건 오로지

새날

풋기운!

운명은 혹시

저녁이나 밤에

무거운 걸음으로

다가올지 모르겠으나

아침에는

운명 같은 건 없다.


- 살아보니....결국 운명이었더라...라는 말을 싫어한다, 거부한다. 그리하여 그저 심심풀이로 보는 사주니 운세니 하는 것도 본 적이 없다. 누군가가 좌우하는 삶을 살아내려 그다지 애썼다는 것, 스스로의 선택이었고 그 결과를 책임지려 했는데 알고 보니 난 대본대로 움직인 배우였다는 것, 동의하고 싶지 않다. 아직은 나의 오만함일지라도 내 삶의 주제는 나임을 믿는다. 이런 나를 위로하는 시이니...나는 시인에 의하면 아침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내 막음날 결국 신의 뜻이었구나 할지라도 그건 저녁이나 밤의 일이리라. 아직 살아가야하는 낮시간이 있으니 풋풋한 새살 기운으로 열심히 살 것이다.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해마다 새학급의 새학생들을 맞을 때 꼭 다짐하는 시이기도 한다. 어느 인연이들 소중하지 않으며, 고귀하지 않겠냐마는 나에게 맡겨진 학생들의 일 년 경유지로 만나는 인연이 실은 그들의 삶에 얼마나 소중할지를 아니 더 귀히 여긴다. 때론 상처 입은 여린 날개를 지닌 아이들도 있으니 따스한 바람같은 위로를 전하는 교사이면 좋겠다.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뛰어오르는 꼴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 더 높은 곳에서 낙하하는 공이 더 높이 튀어오르며, 지금은 멈춰 있는 공도 조그마한 손길에 떠오를 수 있으니 둥근 공은 최선의 꼴이란 말이 딱 맞다. 그리하기가 쉽지 않다 하더라도 공처럼 쉽게 좌절하지 않으며,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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