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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지 않는 감정 절제의 시인

-나희덕 시인과 시

by 다담

"시인의 시선으로 삶을 보라"고 한다. 늘 반복되는 일상이고, 늘 만나는 사람들과 풍경들이고, 늘 반복해서 하는 일들 속에서 무료하고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우리들과 달리 그 속에 숨은 진실과 가치를 읽을 수 있는 시인의 시선을 가진다면 삶은 얼마나 감동적이고 아름다울까.

그리하여 내가 스치고 지나가버린 것들의 가치를 재조명해 주는 시를 읽고 나면 놓친 것들이 그리 아쉬울 수 없다. 물론 뒤늦은 아쉬움은 다가오는 새로운 것들에 대한 자세를 알려주기에 고맙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나희덕 시인은 참 좋다. 잊고 있었던, 그저 스쳐 지나온 것들에 대한 향수를 나지막한 소리로 읊어주는 그녀의 시는 따스하다. 때론 애틋하여 가슴이 시리기도 하고, 때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기도 하는 시를 읽고 있으면 그래도 한움큼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마음이 생긴다.

넘치지 않는 담백한 절제의 태도에 오히려 삶에 동요되지 않는 작가의 심지가 느껴진다.

못 위의 잠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도 흙바람이 몰려오나 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에게 헌정한 듯한 이 시는 시인 특유의 절제된 정서 표현이 탁월하다. 어두워진 저녁, 실직한 남편이 아이들과 함께 아내를 마중 나가선 귀가하는 서사를 담고 있는 이 시는 아내의 파리한 얼굴과 달빛을, 한 걸음 뒤따라 가는 남편의 모습과 못 위에서 꾸벅꾸벅 잠을 청하는 아비 제비와 병치시키고 있다. 두 아비의 모습이 교차되변서 아린 슬픔을 주나, 작가가 어떤 감정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저 짐작하게 하는 그 정서로도 충분히 작가의 애정이 느껴진다.


귀뚜라미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 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을 하나 올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 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 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 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 지하 콘크리트 바닥에서, 누군가의 발길에 눌려 우는 울음일지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울리고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이기를 바라는 진정한 희망의 시이다.


어머니의 일터였던 보육원에서 나고 자란 시인은 '고아 아닌 고아' 로 소외된 아이들과 같이 자라며 그들과 공동체 의식을 공유했다고 한다. 그 친구들의 마음에 행여 상처를 줄까하여 그들을 소재로 한 글쓰기는 평생 하지 않겠다고 한다. 허나 그의 시에게는 이 시대의 아파하고 추워하는 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충분히 녹아 있다. 시혜적 연민보다는 같이 공감하고 희망을 가지자는 위로가 느껴진다.


배추의 마음


배추에게도 마음이 있나 보다.

씨앗을 뿌리고 농약 없이 키우려니

하도 자라지 않아

가을이 되어도 헛일일 것 같더니

여름내 밭둑 지나며 잊지 않았던 말

- 나는 너희로 하여 기쁠 것 같아.

- 잘 자라 기쁠 것 같아.

늦가을 배추포기 묶어 주며 보니

그래도 튼실하게 자라 속이 꽤 찼다.

-혹시 배추벌레 한 마리

이 속에 갇혀 나오지 못하면 어떡하지?

꼭 동여매지도 못하는 사람 마음이나

배추벌레에게 반 넘어 먹히고도

속은 점점 순결한 잎으로 차오는

배추의 마음이 뭐가 다를까?

배추 풀물이 사람 소매에도 들었나 보다.


- 배추벌레 한 마리도 가여히 여기는 농부의 마음이 배추에게 물들어 반이나 먹히고도 튼실하게 자라는 배추들...뿌듯하다. 교감이 무엇인지 잘 알려주는 시이다.


깊어가는 가을, 나희덕 시인의 시로 가슴 따뜻한 정서 만끽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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