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적 비극을 뼛속까지 고스란히 겪은 이중섭이지만 그의 아내 사랑, 가족 사랑은 특등이었다. 식민 시대 민족성향이 강한 그에게 연모의 대상으로 다가온 종주국 일본 여인 마사코, 이남덕. 그 끝이 비극일지언정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이라던가. 스물 다섯 청년 이중섭이 글 없는 그림 엽서 고백으로 시작한 그들의 사랑은, 짧게 함께한 사랑이었지만 길게 오래 여운을 준다. 전란 기간 이리 저리 옮겨 다닌 여러 피란지 중 유독 짧게 지낸 곳이나, 제주 서귀포에 그의 거리가 있고 미술관이 있는 이유도 따뜻한 남쪽 나라 제주에서 함께한 그 시기가 그에게 가장 행복했던 찰나였기 때문이리라.
가족과 머물렀다는 1.3평의 단칸방은 네 식구가 발뻗기조차 협소하나, 그 시절 그린 그의 그림은 온통 밝고 희망에 차 있다. 식량 배급으로는 턱없이 모자란 끼니 해결을 위해 잡아 먹은 게와 조개에게 미안해 온통 아이과 게 그림이 많은 시절이었다. 찰나같은 행복의 일 년을 보내고 일본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 보내고 외톨이로 전란의 비극을 겪으면서도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여백에 그린 그림들은 그저 사랑스럽기만하다. '그의 글에는 혀가 있는 것같다'는 어느 연구가의 말처럼, 단어 하나하나 문장 속속 마다 애정이 가득하여 쓰다듬는 듯하다.
미술관 마당에서 제주 바다를 바라보면 그가 남긴 대표작 '섶섬이 보이는 서귀포 풍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다. 그와 가족들이 서로를 사랑스레 바라보며 즐거이 게를 잡고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리라.
이중섭 거리로 조성된 산책로를 걸으며, 인간 본연의 모습 그대로를 자연스레 그리고자 한 그를 단순히 춘화 작가라 폄하할 수 있는지, 온통 가족 그림뿐이라고 그를 개인적 신변작가라고만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전쟁과 피란, 이산의 현실을 온 몸으로 겪으면서도 예술혼을 불태운 그의 삶은 그저 민족적 수난과 비극을 대변하고 있다. 그 속에서 결국 홀로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한 슬픈 남자이고 남편이고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늘 이중섭 화가를 생각하면 시대적 불운아라는 아린 연민의 마음이 앞선다. 삶과 반대되는 그의 그림의 가족에 대한 애정을 담은 그의 의지였기에 더 외경심마저 드는 것이고, 그리하여 제주에서 꼭 찾게 되는 곳이 이중섭 미술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