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 그림을 취미로 그렸다. 그림책 작가가 꿈이었기 때문에 잘 그리고 싶었다. 유화를 몇 년 동안 열심히 배우며 꿈을 키웠지만 그림책 그림을 그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파스텔과 색연필을 제일 좋은 것으로 사고 집에서 연습했다. 작은 그림은 참 어렵다.
그러던 중 아는 작가 선생님의 원룸 작업실 이야기를 들었다. 동화에서는 국내 최고로 꼽히는 분이니 작업실을 가질 만도 하다. 부러웠다. 자기만의 공간을 가진다는 것이. 문득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나름 큰 수술을 마치고 집에서 회복 중이었을 때 가족들에게 서운한 일이 있었다. 환부가 깨끗이 낫지 않았는데도 차키를 들고 가출을 했다. 막상 나와보니 갈 곳이 없었다. 세종에 가족과 친구가 없는 내 현실이 서러워 극장 의자에 몸을 구기고 앉아 한참 울었다.
그래, 나도 내 공간을 만들어 보자. 다음날 바로 부동산에 가 계약을 하고 책과 미술도구만 갖춘 작업실을 꾸몄다. 별달리 작업이란 것을 하지 않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집에 쌓을 곳이 없던 책들을 옮기고 미술도구들을 가져다 두니 제법 모양새가 갖추어졌다. 작업실이 생기고 한동안 살다시피 했다.
종일 아이들과 지내다 보면 어느 순간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은밀한 도피처로 향한다.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는다. 그곳에서 나의 글쓰기도 시작되었다. 읽고 필사하기를 반복하다 내 글을 조금씩 쓴 것이다. 글 쓰는 재미에 빠졌을 때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나의 세계에 빠지기도 했다. 가족들의 원망과 걱정이 돌아왔지만 양보하지 않았다.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주는 평온함을 내어주기 싫었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작업실 에어컨이 낡은 데다 실외기실 바로 옆이 내 방이어서 소음이 심했다. 어제 여름 내내 방치해 두었던 나의 아지트로 갔다. 가을이 왔으니 다시 나의 공간을 즐기기 위해서다. 월세와 관리비가 녹록지 않지만 다른 곳에 쓰는 돈을 줄여서라도 계속 이곳을 유지하고 싶다.
아무도 모르는 나의 세계. 책과 글과 그림, 그리고 나의 꿈이 자라는 곳. 나의 돈지랄이 가장 효능감을 발휘하는 지점이 아닌가 싶다. 올 가을 이곳에서 새 책을 구상하고 충실히 써 나가려 한다. 내가 나로 충분한 곳에서 여유롭고 치열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