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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동네에 산다

ㅡ4. 냄새 (냄새가 넘어와 / 빈집)

by 사색유희

4. 냄새

(냄새가 넘어와 / 빈집)


동익

: 근데 냄새가 선을 넘지. 냄새가. 씨.

차 뒷자리로 존나 넘어와 냄새가, 씨, 쯧

가끔 그,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 있어. 그런 거랑 비슷 해.

연교

: 어유, 몰라 난 너무 오래돼서, 지하철 타 본지

동익

: 지하철 타는 분들 특유의 냄새가 있거든



기정

: 그게 아니라 반지하 냄새야 이 집을 떠나야 냄새가 없어진다고.




동네에 그 냄새가 나기 시작한 건 그쯤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낡은 집을 깨부수면서부터.

아현 1 구역을 제외한 사방에서 새 아파트를 세우기 위해 철거 공사가 시작되었다.

폐가가 된 집들의 창문은 없거나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사이사이를 떠돌던 흙먼지와 냄새들이 동의도 없이 넘어오고 있었다.

동네에 남은 사람들은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텅 빈 집 특유의 곰팡내와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철거와 공사가 속도를 낼수록 매일 몇 차례씩 흙먼지를 쓸어내기 바빴다.


냄새와 먼지에 유독 취약한 나는 매일 이비인후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심한 날은 약 먹고 토하는 일을 몇 번 반복해야 통증이 겨우 가라앉았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은 각자의 고통과 매일 침범하는 흙먼지를 털어내는 불편을 겪으면서도

의례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기존 아파트 중엔 새 아파트가 조망을 가린다며 침해권에 관한 플래카드를 내건 곳도 있었다.

그 아파트 역시 바로 뒤에 위치한 빌라들의 조망이나 햇볕을 가린 지 이미 오래되었었다.

그렇게 일부는 자기 뒤편의 고통은 보지 못하고 자기 앞의 불편을 참지 못했다.


똑같은 공간에서 헌 집이 새집 되고 오랜 이웃은 떠나고 새로운 이웃이 온 것뿐인데,

동네엔 이상한 기류가 돌기 시작했다.

동네가 낡았어도 가난한 사람만 모여 사는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아파트 값이 비싸다고 모두 부자만 이사 온 것도 아니었다.

원주민이어도 대형 평수에 그대로 입주해 사는 사람도 있고,

새로 입성한 주민이어도 빚더미를 머리에 이고 온 사람도 있었다.

동네는 그대로인데, 교체된 풍경들에 의해 농도 짙은 차별이 펼쳐졌다.

시사 프로그램이나 뉴스에서도 임대아파트 공간과 사람을 분리해서 차별한다는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이 공간에 남게 된 것뿐인데, 아직 낡은 꼴로 남은 것만으로도

불손한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냄새를 알아차린 자는 기억이 필요하고,

냄새를 잊은 자는 망각이 필요했다.

어느 날, 잔뜩 탄 냄비 냄새에 잠에서 깼다.

'독가스가 이런 걸까. 이래서 사람이 죽을 수 있는 거구나.'

목구멍과 폐가 잔뜩 찔리고 긁히는 것 같았다.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눈물 콧물 쏟아내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나와 달리 엄마는 그 냄새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났다.

엄마가 냄새를 모르는 것이 꽤 심각한 일임을 가족들 또한 인지하지 못했다.

엄마는 인지장애와 초기 치매 단계 사이였다.

친할머니가 길을 잃고 헤맨 일이 많았었는데, 그 시기엔 도움을 받을 곳이 어디도 없었다.

엄마는 다행히 이제 막 치매센터가 운영되던 시기라 운 좋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시작을 하기까지의 과정이 많이 힘들었다.

우선 증상을 인지하고.. 아니, 인지는 못해도 가능성을 인정하고 검사를 받아야 했다.

아빠는 왜 사람을 병신 만들려고 하냐며 길길이 날 뛰었고, 엄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식하자고 꼬셔 가족 셋이 택시를 탔다

센터 도착 3분 전, 목적지를 알렸다.

아니면 다행이고, 맞다고 해도 친할머니처럼 길 잃고 헤매게 하는 지경까진 안 가게 예방할 수 있다고

강요 반, 설득 반으로 겨우 센터에 첫발을 내디뎠다.

추가 검사가 필요해 연계된 대형병원으로 갔다.

의사는 가난해서 치료가 힘들어 보이니 비싼 검사 대신 약물 치료를 권했다.

아마도 불쾌, 모욕, 불신?…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그래도 미리 예방해야 했다. 더 나빠지는 걸 막아야 했다.

검사비를 결제했다.

엄마는 걱정 많은 얼굴로 "아우ㅡ병원비 비싼데, 내가 낼게."

꼬깃한 주머니를 두 적이며 “한 10만 원 해?”

나는 “아니. 얼마 안 해.‘

그날, 병원비와 약제비는 모두 100만 원이 조금 안되었다.

10년 전이었다.

나는 표정을 얼음처럼 감추고, 병원 올 땐 맛있는 거나 먹으며 기분 풀자며 엄마를 달랬다.

고생한 자신을 위해선 단 돈 10만 원도 시원하게 써 본 적 없는 엄마였다.

진짜 병원비를 말하면 속병이 커져 오히려 악영향이 될 것 같아 숨겼다.

그렇게 또 차곡차곡 부ㅡ채가 쌓이기 시작했다.

연계된 병원에서 비싼 값을 치르는 게 아깝고 못 미더웠다.

집과 가깝고 엄마의 병원 이력이 있는 신촌세브란스로 다시 가서 새로 검사를 받고 치료를 시작했다.

한 곳에 진료 히스토리를 쌓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병원에선 다양한 검사와 치료를 진행했다.

후각검사를 시행하기도 했는데, 담당의는 엄마가 냄새를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했다.

이 정도면 간을 못 볼 거라고. 그리고 후각이 쇠퇴하고 미각을 잃는 건 치매 증상 중 하나라고 했다.

엄마가 친할머니처럼 길 잃고 헤매는 일만은 막으려고 미친 듯이 일하고

치매센터, 동네 스포츠센터까지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상태를 살폈다.

하루 투 잡을 뛰고, 엄마를 위한 투 보좌?를 했다.

회차로 출근했다가 다시 집으로 출근을 반복하는 것 같았다.

그 생활이 길어질수록 나는 집과 함께 볼품없이 낡아지고, 그 가난에 잠식되어 갔다.

동생이 부자가 된 후에도 그 생활은 오로지 혼자만의 몫이었다.

동생이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거나 자기 부를 과시한다고 해도

우리 생활은 점점 더 진흙구덩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시간이 흐르고 보니 동생과 나 사이에 빈부격차가 심하게 벌어져 있었다.


어느 날, 우체통에서 낯선 동네의 새 아파트 입주민을 위한 청소 안내문을 뜯어보게 되었다.

부모는 여차저차 아파트에 이사가게 된 걸 그때까지 함구하고 있었다.

나는 배신감에 온몸을 떨며 당장이라도 부모를 죽일 것처럼 달려들었다.

며칠 후 부모는 쓰레기만 남기고 집을 떠났다.

이삿짐을 옮기던 인부가 이상했는지 “혹시… 여기 사람 살아요? 그런데 이렇게 쓰레기를 방치하고 가면 어떡해요.” 하던 음성을 잊을 수 없다.

중 3, 부모를 쫓아갔다 다시 온 집에 이제 나는 최후의 패자로 남게 되었다.

모두 떠났다.

가족뿐 아니라 유독 우리 골목엔 사람이 별로 없다.


떠난 사람들은 가난의 냄새들을 잊었다. 이젠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

가난해진 나는 철거되어야 마땅할 집들과 다름없었다.

나는 떠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멈춰 냄새를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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