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3. 기회
3. 기회
20대, 나 스스로 꿈을 거세했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고등학교 진로가 결정되면서부터였다.
나는 대학을 가면 안 되고 일찍부터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 3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곧 고등학교 진로상담이 시작되었다.
아빠의 사업실패로 도망치듯 이사한 며칠 후였다.
진로 결과를 들은 건 아빠가 부모님 상담을 한 다음 날이었다. 담임의 입을 통해서...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내 진로는 상고로 결정되었다.
그때까지 거의 대화를 나눠 본 적 없는 아빠에게 무슨 말을 할 엄두를 못 냈다,
한창 속을 태우다 고등학교 답사를 다녀와서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
"고등학교 안 가면 안 돼요?"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담임을 붙잡고 울고불고 매달렸다.
"제발, 자퇴시켜 주세요."
쉬는 시간, 친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복도에서...
유치원 때부터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던 나는 대학을 못 간다는 상상을 못 했었다.
나는 딸이니까 상고를 보내고, 동생은 아들이니 대학을 보내라는 말을 엄마에게 남기고 세상을 떠난 작은 엄마의 말을 듣고 있을 때도..
대학의 꿈을 거세하고 고3 취업을 바로 앞둔 시점에 친구들 사이에선 내가 대학을 가나, 못가나 하는 이슈로 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졸업하고 1년 후쯤 주위에선 내가 1개월도 못 버틸 줄 알았는데, 아직 버티고 있어서 놀랐다는 후기를 남겼다.
대학의 꿈을 거세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든 내 앞에서 아빠는 두고두고 대학을 가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자퇴시켜 달라고 울고불고 매달렸던 담임은
"지금이라도 꼭 대학에 가. 그때 넌 상고를 오면 안 됐어. 다른 아이들과 생각하는 수준이 너무 달랐어.
그때 자퇴를 받아주면 네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널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랐어."
담임의 말을 듣고 왠지 모르게 애증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담임이었다.
교복을 벗기도 전에 사회 초년생이 된 나는 청년이 될 수 없었다.
대학에 못 간 나는 청년의 범주에 속하지 못했다.
불합리를 모르고 견뎌내며 살아야는 일개미 중 하나일 뿐
기정이 학원도 못 간 것처럼
나도 다르지 않았다.
기정은 학원을 못 갔어도 스스로 취득한 정보들로 인정을 받는다.
누구도 길들이지 못한 다송(둘째)을 길들인다.
학위만 없었을 뿐. 학위 딱지 하나를 떼니
그녀의 실력이 유능하게 빛을 발했다.
나는 일찍 취업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오히려 후회는 없었다.
사회경력이 5년 차쯤 되었을 때 친구들은 IMF 후폭풍으로 취업이 안 돼서 힘들어했다.
취업이 어려우니 대학원이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차라리 경력이 쌓이고 안정적인 회사를 다니고 있는 내가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영화 공부를 시작했을 때 그렇게 쌓인 경력들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학 나온 친구들이 최저시급 일자리도 찾기 어려워할 때, 나는 2배 내외 시급의 알바자리를 쉽게 찾았으니까.
그 후에도 대학 나와 자격증이 많은 친구들을 쓰다가 업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해 경력자를 찾는 대표를 만나면 더 인정받기도 했다.
기정은 집안에서 책사 같은 역할을 한다.
조정 경기에서 방향키 같은 역할이랄까?
주도적으로 방안을 제시하고 이끌지만 주목은 다른 사람이 받는...
기정은 박사장네서 가족 중 가장 실력을 인정받는다.
사건의 본질을 가장 먼저 꿰뚫는 것도 그녀다.
박사장네가 냄새를 불편해할 때, 그 냄새가 반지하 냄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반지하를 탈출해야 냄새가 사라진다는 본질을.
그런 기정이 다송의 생일날 냄새나는 남자들의 아귀다툼 속에서 희생자가 된다.
고3 돈이 없어 대학을 포기하겠다는 동생에게 입학금은 어떻게 든 마련할 테니 학교 가서 장학금이든 아르바이트든 스스로 벌어서 졸업하라고 한참을 설득해 입학시켰다.
내 통장의 991원을 제외한 모든 돈을 뽑아 동생에게 던져주고 아빠에게 남은 돈을 채울 것을 강제했다.
그렇게 안 하면 아빠는 내게 그랬듯. 대학 보낼 생각 따윈 안 했을 테니까.
그날 통장 전액을 털어주었고 새로운 회사로 출근하던 날 아침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내 전재산을 털었는데,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 나이 때만 해볼 수 있는 경험.
그것만큼 값진 기회는 없다.
사회에서 만난 은희언니는 항상 내게 그 "경험을 사"라고 해주었다.
그 나이 때 또래가 누리는 재미나 사치는 모르고 살던 내가 안타깝다고 했다.
12개월 할부로라도 해외여행을 다녀와 보라고 했다.
매월 청구서를 볼 때마다 피식 웃음이 먼저 날 거라고.
정말 그랬다.
친구들이 매달 쓰는 유흥비를
나는 1년에 1번 저렴한 패키지여행으로 추억을 쌓았다.
동생이 군 제대 할 무렵 대학생들의 필수 경험 같았던 유럽배낭여행을 계획했다.
그게 뭐길래 다들 입을 모이 배낭여행을 다녀와야 한다고 하는지...
동생에게 꼭 경험을 사주고 싶었다.
빚을 모두 갚을 때까지 이를 악물고 다닌 회사를 나올 때 받은 퇴직금 전부로 배낭여행 티켓을 끊었다.
나는 여행 전 날 다쳐 입원해서 가지 못했고, 여행 다녀온 동생은 두고두고 감동을 이야기했다.
동생은 대학 등록금이나 배낭여행이나 일련의 희생들을 두고두고 고마워하더니 결혼과 동시에 돌변했다.
"그때 대학가지 말걸 그랬어. 그 돈 받지 말걸."
처음으로 후회했다.
내게 기회를 줄 생각은 못하고,
동생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기 위해 애썼던 시간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