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어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주혜 May 22. 2023

동경(憧憬)

뭉근함을 끄적이는 밤

애잔한 가지 끝에 매달린 처연함을 고이 받아 적어내고, 섧게 울어대는 백지 위에 검은 고요의 정렬을 이어나가고, 흔들거리는 위태로운 것들을 지탱하며 아슬하지만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장면하나 없이, 색채 하나 없이 그려내는 무채색의, 희고 검은 것들의 조합을, 어울림을 사랑하였고, 나는 그것들을 닮아내고 싶어 몹시도 그것들을 동경한다.


읽는 이유이자, 쓰는 이유다.


가끔은,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문장을 갖고 싶다는 허망한 생각이 들때가 있다. 그런 때면 가장 아끼는 종이에, 가장 길이 잘든 만년필로, 밤하늘 달빛을 닮았다는 잉크를 채워 문장을 따라 써본다. 적확한 자리에 놓인 단어,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쉼표 하나, 문장 언저리를 빙빙 돌면서 서성이다가 그 문장을 닮고 싶어서, 그 단어를 닮고 싶어서 한참이나 종이 위를 걷는다.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와 문장은 항상 그러했다. 갑자기 먹먹하게 만들어 버리거나, 단어 앞을 떠나지 못하고 붙잡히게 하거나, 심연에 가라앉아버린 품고 있던 의미를 들춰버리거나.


닿을 수 없는 것들을 닮고 싶어 동경했다. 가까이 있는 것들에 대해서 동경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내게 있는 것에 대한 동경은 불가했다. 닿지 못한 곳, 지나온 곳 그리고 의지로는 어찌하여 볼 수 없었던 일들에 대하여 동경이 남았지만 때때로는 무엇인지도 모를 막연함을 동경하여 마음에 품어보는 일은 가슴을 뭉근하게 데워주는 것이었다. 따듯한 것이 그리울 때, 동경하는 것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쏟아내려 애써도 기어이 뱉어내어지지 않는 문장들을 꺼내보기 위해 사각거리는 펜 끝으로 아직 닿지 못한 미지의 문장에 신호를 보내보곤 한다. 오래도록 따듯하게 머무를 문장과 닿고 싶어서. 혹시 내 안에도 동경의 문장이 있을까 싶어서.


동경하는 문장들은 그리운 것을 그리게 하고, 아스라이 뭉툭해져 가는 것들을 보존하게 한다.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들에 대한 선명함을 부여하고, 말해야 할 것과 침묵해야 할 것을 구분하게 하며, 돌아서야 할 것과 되돌려야 할 것들에 대하여 안내한다. 이를 닮은 문장을 써 내려가고 싶어질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닮아보고 싶어 글과 문장을 그리워하고 동경한다.


글자 곁을 늘상 맴도는 이유다.


겨우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겨우 꺼내어 놓는 글자에 대한 동경.

가질 수 없어서 아름다운 것들이 깊이 내려앉는 밤.

그런 문장들을 닮고 싶어서 여전히 서성이며 동경하는 뭉근함을 끄적이는 밤.

매거진의 이전글 산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