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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은 디자이너 Mar 16. 2024

16_나는 조기은퇴가 나의 꿈인 줄 알았다.

하와이병에 걸리다

파이어족을 꿈꾸며


코로나가 시작된 지 벌써 4년이 지나가는 요즘. 지금도 파이어족이 그때만큼 유행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파이어족에 관심 갖고 빠져든 건 2020년 초였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많은 비즈니스가 타격을 입었고 내가 일하는 업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하는 일은 브랜드 경험 공간 디자인이었는데 이 일은 물리적 공간에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이 참여하고 경험해야 한다는 게 포인트였다.


그렇게 언제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하루하루 살고 있었다. 팀의 디렉터에게 얘기해 봐도 그나 나나 결국은 매달 월급을 받는 건 똑같은 입장이었으니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때 전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나도 투자공부에 빠져들었다. '그래! 살길은 이것뿐이구나!'라는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열과 성의를 다해 하나씩 배워나갔다. 나름 경제학과 출신이라고 투자공부나 돈공부가 꽤나 적성에 맞고 재미있었다. 그렇게 나는 불안함을 안고 회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각종 영상으로 투자공부를 했다. 저녁엔 부가수입을 추가하기 위해 학교 수업, 개인교습등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 투자금액을 늘려갔다.


목표는 오직 조기은퇴!


꿈을 찾기 위해 그 생고생을 했으면서 꿈을 이룬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나는 빨리 은퇴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이 된 것이었다. 참 생각할수록 아이러니했다. 평생 가슴 뛰는 삶을 살고 싶다고 이 먼 땅에 와서 디자인학교를 다시 가고, 거기에 대학원까지 나와서 이제야 사회생활을 한지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래 뭐, 인생이 어디 뜻하는 대로 되던가. 나에겐 그것보다 이 불안함에서 벗어나는 게 더 중요했고, 무엇보다 이렇게 지친 몸과 마음으로 그게 어떤 일이 되었던 60살, 70살까지 하는 건 끔찍한 악몽처럼 보였다.


무릉도원이
실제로 존재하다니


 그렇게 파이어족의 기운을 받아 나는 나름 성공적인 투자를 했다. 또한 다행히도 회사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고, 우리 팀은 전원 모두 생존했다. 물론 그 뒤에는 재미있는 스토리가 꽤 많다.


 그중 기억나는 건 내가 한동안 엄청 열심히 회사 직원들 전용 마스크 디자인을 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디렉터가 어떻게든 팀을 살려보겠다고 노력하는데 거기에 무슨 질문을 하겠나. '그냥 아무 일이나 줘도 돼! 다 경험이지!' 그렇게 이 기간 동안 나는 새로운 프로그램도 배워보고 여기저기 다른 팀에 지원을 나가서 안 해본 일을 경험해 보면서 힘든 코로나 시기를 나름 잘 헤쳐나갔다.


 2021년 여름, 코로나의 2차 공격으로 모두가 지쳐가던 시점이었다. 모두 여행을 자제하던 시기여서 인지 나의 꿈의 여행지, 하와이 비행기표가 말도 안 되게 저렴하게 나온 것이다. 거기에 에어비앤비 숙소도 찾는 사람이 많이 없는지 꽤나 괜찮은 가격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투자한 덕분에 내 통장 사정도 꽤나 괜찮아졌고 무엇보다 내가 꿈에 그리는 하와이라니! 이건 무조건 가야 했다. 그렇게 나의 인생에서 잊지 못할 하와이 여행이 시작되었다.


 내가 간 곳은 하와이의 여러 섬 중에서도 가장 인적이 드물고 개발이 안된 카우아이(Kauai)라는 곳이었다. 함께 간 동행은 이미 하와이를 다녀왔고 나의 성향을 너무 잘 파악하고 있어서 단번에 카우아이를 추천했다. 나는 원래 인간이 만든 어떤 건축물이나 도시 구경하는 것에는 큰 흥미를 못 느낀다. 무엇보다 가장 싫어하는 건 상업성이 짖은 분위기에 관광객이 가득한 장소들이다. 그래서 나는 맨해튼에 살면서도 정말 필요한 일이 있지 않으면 타임스퀘어가 있는 42 번가 쪽은 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정신없이 쏟아지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영혼이 탈탈 털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도착한 설레는 마음을 안고 도착한 카우아이는 정말 천국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아름다웠다. 그냥 어떤 장소에서 숨 쉬는 게 행복해서 벅찰 정도였던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나름 여기저기 여행을 다녀봤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차원이 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냥 그 자연 속에서 내가 있다는 사실로 너무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나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일출을 바라보았다. 파스텔 톤의 투명한 하늘은 너무 높고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현실과 비현실의 사이를 오가는 그곳에 앉아 있으며

나는 생각했다.


“내가 죽을 때 떠올릴 하나의 장면이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일 거야.”


조금 과격하게 말하면 나는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 싶었다. 하와이에서 머무는 2주 동안 매일 일출을 보러 갔고 첫날의 감동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커져갔다. 지금 생각해 보니 모든 조건이 완벽했지 않나 싶다. 원래 조용하던 섬이었지만 코로나의 영향으로 더욱더 인적이 드물었다. 그 덕분인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 세상엔 나와 자연 그 자체만 존재한다고 느껴졌다.


하와이 병에 걸리다


 그렇게 꿈같던 시간을 보내고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심각한 병에 걸리고 말았다. 치료가 지독히 어렵다는 '하와이 병'에 걸린 것이다. 돌아와서 한동안은 찍어둔 사진과 영상을 보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처음 하와이에 다녀오면 다들 그런다기에 그냥 그 시간들을 그리워하며 일상을 보냈다. 하지만 한 달, 두 달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나의 상사병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상사병에 시달리던 나는 정확히 1년 뒤 다시 카우아이로 향했다. 이 시점에서는 비행기표가 얼마이고 숙소가 얼마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무조건 나는 가야 돼!' 이 마음뿐이었다. 나의 마음 한편에는 '두 번째 가면 조금 감동이 덜하겠지. 그러면 나의 이 대책 없는 상사병도 사라지겠지.' 싶었다.


그렇게 도착한 카우아이는 여전히 눈물 나게 아름다웠고 나는 처음 여행보다 더 좋은 추억을 만들고 마음속 한가득 그곳에서 느낀 감동을 담아왔다.


마음의 확신이 생겼다. ‘그래, 내 꿈은 이제부터 하와이에 가서 사는 거야!' 이 작은 마음속의 불씨는 꺼질 줄 모르고 더욱 활활 타올랐다. 장기간 시달리던 번아웃으로 디자인에 대한 열정도, 꿈에 대한 미련도 더 이상 사라진듯했다.


그렇게 해서 나의 꿈은 다시 설정되었다.


하와이에서 조기은퇴.


 나는 때로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주의자이며 또한 현실주의자이다. 공상을 좋아하기에 각종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낙천적인 미래를 꿈꾸며 이상적인 현실을 추구한다.


 그러다가도 현실주의자인 내가 튀어나와서 이 모든 계획은 산산조각 내버린다. 돈 한 푼 없이 미국에 와서 나는 꽤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깨달았다. 돈도 계획 없이 어떤 것에 뛰어든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모한 일인지 말이다. 하지만 하와이 병은 너무 강력했다. 현실주의자를 나의 뇌에서 영구히 추방이라도 시킨 듯 나는 이상주의자의 달콤한 유혹에 완전히 넘어가버렸다.


"우리는 노동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즐기고 여행하고 놀라워하기 위해 온 것일 테니까."


너무 좋아서 따로 메모해 둔 작가 채사장님의 '열한 계단'에 나오는 구절이다. 현실주의자가 사라진 나는 외쳤다. '드디어 책으로만 읽고 느끼던 삶을 살 수 있게 된 거야!


 나는 이러려고 이 작고 소중한 지구별에 온 게 아닐 거야. 하와이에 가서 뭘 하고 먹고살든 나는 그냥 살아 숨 쉬는 그 자체를 감사하고 매 순간을 느끼며 살겠어!'


기다려, 하와이!

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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