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대한 애정도 숨 쉴 틈을 주어야 한다.
하와이 병의 실체
나의 하와이 이주 계획은 꽤나 진지했다. 재택으로 하와이에서 디자인 일을 하는 게 가장 최선이지만 그게 잘 안될 경우를 대비해 다른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구인 사이트를 드나들었다. 사실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카우아이에서 내가 푹 빠져 매일 아침에 갔던 그 작은 베이커리에서 일해보는 것이었다.
소박한 규모의 가게지만 들어서는 순간 온몸을 감싸는 빵냄새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곳이었다. 편안해 보이는 인상의 직원들은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고 카우아이 섬 전체가 그렇듯, 모든 것이 조금 느렸다. 그들과 매일 아침 인사를 나누며 상상했다.
만일 내가 이 안의 일부가 된다면?
나도 저들처럼 행복해질까?
이런 부푼 희망에 가득 차 있던 어느 날이었다. 역시나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라더니. 하와이에 두 번째 다녀온 감동이 다 사라지기도 전인 8월 말, 우리 가족에게 예고치 못한 시련이 닥쳐왔다. 아빠는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꽤 긴 시간 중환자실에서 생과 사를 오가고 기적적으로 깨어났지만, 이미 몸의 왼쪽이 전부 마비된 상태였다.
그렇게 시작된 시련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기다린 듯 나타났다. 하와이로 터전을 옮길 계획을 짜던 그 설레던 날들은 현실에 닥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 날들로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그 짧은 일 년 반이란 시간 동안 남은 10%의 에너지마저 다 써버린 나는 드디어 방전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전화위복
폭풍의 눈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타의로 인한 휴식이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니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궁금했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강력한 조기은퇴 병에 빠지게 했을까?
나에게 일이란 어떤 의미일까?
원인을 알아야 또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 같았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와중 나에게 답을 준 것은 바로 나의 또 다른 직업 '가르치는 일'에서였다.
나의 순도 100% 백수 기간은 사실 그리 길지는 않았다. 나의 또 다른 직업인 대학원 강의가 가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 3시간 수업이었기에 지난 2년은 직장을 다니면서 병행했다. 회사에서 많이 배려해주기도 했고 코로나 영향으로 일이 바쁘지 않은 날도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보스턴으로 이사 오면서 나의 통근이 1시간이 아니라 8-9시간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원래 나의 계획은 새벽 5시 기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하는 9시까지 회사 업무를 보고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기차에서 남은 4시간을 일하는 것이었다.
나의 야무진 계획은 첫날 출퇴근을 해보며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벽 4시에 눈을 뜬 탓에 기차에 타자마자 기절해 버렸고 오후 기차에선 모든 걸 쏟아부어 수업을 했기에 한 시간 정도는 기절했다 일어나야 머리가 말끔해졌다.
기존 회사를 다니면서 수업을 했다면 그 결과는 두 가지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제대로 회사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서 나는 대학원 강의를 포기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든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면 나는 번아웃으로 영혼까지 활활 타버렸을 것이고 내가 사랑하는 디자이너로서의 일도, 인생의 의미를 주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일도 모두 싫어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학교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그렇게 생긴 여유로 나는 매일매일의 수업이 설레고 너무 즐거웠다. 항상 쫓기듯 학생들과 만나고 헤어졌는데 이제는 한 명 한 명 학생들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학생들과 그들의 프로젝트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최선을 다하며 나는 진정한 '일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멈춰야 느껴지는 것들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달리다가 멈추니 알게 되었다. 나는 사실 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의 꿈은 조기은퇴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오히려 나이 들어서까지 나의 분야를 잘 다듬어서 어떤 공동체도 만들고 그걸 나누며 살고 싶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다만 문제는 너무 많은 일을 쉬지 않고 해 왔고 그 안에서 나의 심신이 너무 지쳐버려 나는 더 이상 나의 일을 사랑하지도, 오래 하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매주 길고 긴 기차 여행에서 많은 생각에 빠졌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40대의 나의 인생은 무엇일까? 20대의 내가 그랬듯, 30대의 내가 그랬듯, 여전히 가슴 뛰고 반짝이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여전히 하와이를 사랑하고 동경하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나누며 누군가의 꿈을 이끌어주는 일을 더 오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음속 여유가 사라지면 이 모든 소중함도 함께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써놓고 나면 참 단순한 진리를 나는 왜 몰랐을까?
어떤 일을 정말 오래 즐기며 하고 싶다면,
나에게 숨 쉴 틈을 주어야 한다. 그 여유 속 틈새 어딘가에서 여전히 일을 사랑하는 나의 애정이 살아남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