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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은 디자이너 Mar 23. 2024

19_결국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된다.

 서로가 남기는 온기와 흔적으로

나에게 친구란


 새해가 시작되고 한동안 못 본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가는 기차 안이었다. 새벽 5시,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두운 기차 안에서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다. 그때 메일 한통이 왔다는 알람이 떴다. 메일은 한국에 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서 온 것이었다.


 나에겐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한 두 명의 절친한 친구들이 있다. 우리는 중학교 1학년때 만나서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가고 있으니 벌써 25년이 넘은 오래된 사이이다. 방학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의 집을 돌아가며 일주일씩 투어 하며 밤이 새는지도 모르고 끝없는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인생에 가장 순수했던 십 대를 함께 보내며 우리는 서로의 자아를 형성시켜주었다. 대학교 때까지도 그렇게 어울리던 우리는 내가 미국으로 오면서 일 년에 한 번 정도밖에 보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물리적 거리는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었고 고마운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내가 한국에 가면 열일을 제치고 나를 보러 나와준다.


 그중 한 명의 친구에게서 길고 긴 이메일이 왔다. 이 친구와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나왔으며 대학은 다른 곳에 갔지만 우린 참 자주 만났고 한동안은 서울에서 자취를 함께하며 인생의 정말 많은 부분을 나눴다. 내성적이고 걱정이 많던 나와는 달리 전교생이 알만큼 활발하고 매사에 단순했던 유쾌한 아이였다.


 정반대 성격을 가진 우리가 만나서 이렇게 오랜 시절 친구로 지내면서 우리는 서로의 성격을 반반씩 나눠 갖게 되었다. 나는 꽤나 많은 것들에 무던해졌고 웬만한 일은 그저 웃고 넘길 수 있을 만큼 유쾌해졌다. 친구는 나의 예민함과 세심함을 가져가서 예전보다 섬세한 감정선을 지니고 타인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친구는 부모님의 사정으로 중학교부터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본인의 집보다 우리 집이 편하다며 학교가 끝나면 우리 집으로 함께와 저녁까지 먹고 실컷 수다를 떨다 시간이 늦어서야 집으로 향했다. 이렇게 학교와 집에서까지 붙어있으면서도 나는 왜 그렇게 할 말이 많았는지 노트 몇 장이 되는 편지를 자주 썼다. 지금 와보면 왜 그랬나 싶지만 그땐 그 작고 여린 마음에 세상 모든 게 고민이었다. 이런 나를 정말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친구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나는 항상 편지를 보냈고 협박에 가까운 나의 요구에 친구는 노트 반절도 채우지 못한 편지로 답장을 하곤 했다. 그나마도 특유의 웃음소리인 "쿄쿄쿄" 같은 이상한 언어로 채우기가 일쑤였다.


그런 친구가 27년 만에 처음으로 이렇게 긴 편지를 쓴 것이었다. 반가운 마음 반, 놀라운 마음 반에 얼른 이메일을 읽어보았다. 반절도 읽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눈물에 글씨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어두운 새벽 기차였으니 망정이지 정말 못볼꼴 보일뻔했다. 편지를 한번 읽고 다시 처음부터 읽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의 빙하기가
끝을 맺었다


 인디언어로 '친구'라는 말은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나는 나의 아픔을 친구에게 다 말하지 않았지만 친구는 모두 느끼고 있었고, 그런 나를 위해 함께 슬픔을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도 여느 때처럼 한국에 갔을 때 친구와 우리 집에서 밤새 수다를 떨었다. 이젠 마음이 좀 괜찮아졌냐고 묻는 친구에게 나는 대답했다. 이젠 부모님과 서로 많이 이해하게 되어서 괜찮은 것 같다고.


하지만 친구가 기억하는 그날은 조금은 다른 느낌이었던 모양이다. 긴 편지 중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추억이 가득한 그 공간, 냄새, 기억 모두 변한 것이 없는 그곳에 너와 너희 어머님 간의 눈빛은 예전과 다른 것 같은 느낌에,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따뜻하고 무한한 신뢰 같은 것이 없는 듯한 마음이 불현듯 드는데 가슴이 너무 메어지더라.. 누군가를 위해서 사서 걱정하던 이 아이가 이렇게 마음이 굳어지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외로운 타지에서 가족 생각하며 버티고 돈 벌어서 걱정하며 안타까운 맘으로 가족을 돕고자 했던 너의 마음을 너무 아니까 마음이 아프더라고.. 그리고 뭔가 다시 그때의 그 눈빛을 다시 찾을 순 없을까 많이 걱정이 되었어.


어쩌면 나이가 들어 세월의 지나감의 수순일까?라고 생각하기엔 예전 어리던 강지선이 엄마를 바라보던

사랑의 눈빛이 자꾸 떠올라서 지금 달라진 마음새의 너를 안아주고 같이 울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


참 이상한 일이다. 이 글을 읽는데 정말 나의 차갑게 얼었던 마음이 녹아드는 걸 느꼈다. 누군가가 나의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 그 기분이 이런 걸까? 그러면서 친구는 말했다. 그래도 우리 그냥 사랑하고 살자고. 나라는 소중한 존재를 이 세상의 통로로 보내주신 우리 부모님께 감사한다고 말했다.


진심을 담은 긴 글이었지만 유쾌하고 밝은 나의 친구답게 마지막은 변함이 없었다.


"걱정 따윈 개나 줘버려..

그냥 다 사랑하며 맘껏 살자. 알았지?

말이 길어졌네. 여긴 지금 밤이야. 굉장히 감성적으로 써졌을 이 이메일이 내일 아침엔 후회될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이게 더 진심일 확률이 더 높아...ㅋㅋㅋㅋㅋ"


40살이 다 되어서도 '쿄쿄쿄'라며 웃는 나의 친구 덕분에 드디어 나의 춥고 외롭던 감정의 빙하기가 끝을 맺었다.


사라지지 않는 온기와 흔적


2024년 1월 31일


그날 뉴욕에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펜을 들었다. 그동안 꽉 막혔던 무언가를 쏟아내듯 나는 그동안 저 가슴속 깊이 눌러두었던 감정들을 뱉어냈다. 나는 괜찮은 게 아니었나 보다. 서운한 마음, 원망하는 마음, 슬픈 마음, 답답한 마음 이렇게 그동안 내 안에 뒤죽박죽 섞여있던 마음을 실컷 토해내니 뭔가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 냉소적으로 변했을 땐 그동안 내가 공들이며 마음 썼던 많은 인연들이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해도 인연이 다하면 서로의 삶에서 흔적 없이 사라짐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졌다. 가볍게 만난 인연들이 끊임없이 오고 가는 것은 더 이상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마음 한편을 내준 깊은 인연들은 내가 오랜 시간 마음을 쏟고 그들을 진심으로 아끼며 이어온, 나에게는 무엇보다 값진 인생의 재산이었다.


세상의 더 많은 것을

깊게 사랑하자.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내린 답이었다. 꿈을 좇아 여기까지 왔지만 그것이 인생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여전히 답을 찾는 과정이고 나의 대답은 또 시간과 함께 변해가겠지만 현재의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내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인생의 답은 결국 사랑이라고.


그래서 나는 감사했다. 다시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시 진심으로 누군가를 생각해도 괜찮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또한 어떻게 헤쳐 나와야 할지 몰라 계속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들던 슬럼프에서 나를 구해준 친구에게 너무 고마웠다. 친구의 다정한 말에서,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나는 느꼈다.


인간이 인간에게 남긴 온기와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서로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아

또다시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준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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