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선생님이라고 모든 종목을 잘하는 게 아니랍니다…
학교에서 교사 배드민턴 클럽을 시작했다. 배드민턴 전문 강사를 모셔 레슨도 받고 선생님들끼리 게임도 하는 클럽이다. 체육교사로서 총무를 맡았지만 진짜 고수는 과학선생님이다. 배드민턴 경력이 나보다 훨씬 오래되셨기 때문이다. 학교에는 이렇게 ‘숨은 고수’들이 있다. 교사 집단이 재미있는 이유다. 다들 평소에 드러내지 않지만 각자의 분야에서 고수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체육 선생님보다 운동을 잘하는 과학 선생님, 미술 선생님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국어 선생님, 음악 선생님보다 기타를 잘 치는 체육선생님이 있다. 이밖에도 재즈, 위스키, 글쓰기, 꽃꽂이, 수영, 마라톤, IT, 재테크, 요리 등 분야가 다양하다.
체육교사에게는 억울한 면이 있다. 음악 선생님이 플루트를 잘하지 못하면 ‘다른 악기를 하시는구나’하고 이해해주지만 체육교사가 배드민턴을 잘하지 못하면 그냥 운동 못하는 체육선생님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전문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니 억울하다. 이 중에서도 나처럼 특정 종목을 전공하지 않은 체육교사는 더욱 난감하다. 수영선수 출신 체육교사인 아내는 다른 운동을 못해도 “저는 수영했어요.”라는 말을 하면 된다. 그런데 나는 둘러댈 말이 없어 괜히 민망해진다. 선수 출신이 아닌 체육교사는 이런 질문을 종종 받는다.
“전공이 뭐예요?”
“체육교육이요.”
“아니 그래도 전공한 종목이 있을 거 아니에요. 축구? 농구?”
“아뇨. 그냥 체육교육이 전공이에요.”
‘체육교육’이 전공이란 말이다! 자신 있게 말하고 싶은데 변명하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어도 혼자 민망해지는 이런 상황을 탈피해보고자 한 가지 종목을 찾으려 시도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기웃거렸는데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나의 무능함을 자책하던 차에 체육교사들과 대화 중에 민망함의 원인을 찾았다.
체육교사들은 대학부터 체육계에 가깝다 보니 다양한 선수들을 접하게 된다. 그러면서 ‘운동을 잘한다’의 기준이 선수 수준으로 올라가버린 것이다. 나름 수영을 잘한다고 생각해도 내 아내를 기준으로 보면 나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이 된다. 아마추어 축구 클럽에서 나름 역할을 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축구선수 출신 동기의 플레이를 떠올려보면 어디 가서 축구 잘한다는 말은 꺼낼 수가 없다. 그냥 계속 민망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선수 출신 체육교사들도 자신의 종목이 아닌 곳에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한다는 것.(한 종목이라도 자신 있는 게 어디냐 말하고 싶지만)
아내는 물 밖에서 하는 모든 스포츠를 두려워하는 수준이고 축구 선수 출신 동기는 농구할 땐 바보다. 무용전공인 옆 학교 체육선생님은 공이 날아오면 기겁한다. 이렇게 다들 완벽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완벽하지 않은 체육교사의 모습에 좋은 변명거리를 소개한다.
1. 운동을 상대적으로 평가하지 말자. 체육교사라면 더욱!
체육교사의 ‘운동 잘한다’의 기준이 높아지는 것은 평가기준이 상대적이어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 기준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면 겸손이 되겠지만 학생을 향하는 순간 가혹해진다. 체육교사는 엘리트 선수를 양성하기보다 일반 학생의 생활체육이 자리 잡도록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운동을 잘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아하게 만드는 게 먼저 아닐까. 배드민턴 셔틀콕을 주고받는 것만 할 수 있어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해주고, 농구 자유투를 성공하면 아낌없이 박수를 쳐주는 것이 체육교사에게 필요한 자질이다.
2. 교사에게 교수법이 음식 자체라면, 운동능력은 플래이팅.
어떤 종목을 어떤 과제로 제시할 것이냐 하는 교수법이 체육교사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 아닐까. 여기서 선생님이 기막힌 시범을 보여준다면 학생들의 신뢰도가 쑥 올라가겠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학생을 지도하는 노하우다. 저녁식사로 비유하자면 재료를 고르고 손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교수법이고, 똑같은 음식이라도 아름답게 플래이팅하는 것이 선생님의 운동능력이다. 전문성은 교수법에 있는 것이다. (그래도 운동능력이 있는 것이 좋긴 하다.)
3. 종목에 관한 지식이 많다면 실제 운동능력을 만회할 수 있다.
체육 선생님이 운동능력에만 의지한다면 그 생명력은 30대까지다. 슬프게도 노화가 되는 우리 몸은 예전 같지 않다. 이 사실을 인정 못하시는 선생님들께서는 학생 건강체력평가(PAPS) 측정할 때 옆에서 같이 해보시길. 세월의 잔인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체육교사의 권위는 운동능력보다 지식에 기반한다. 심판을 볼 때 자신 있게 휘슬을 불고 파울 내용을 설명해줄 것. 방금 경기에서 나타난 장면에 대해 선생님이 분석해줄 것. 경기 후에 누구의 플레이가 왜 좋았는지를 꼭 말해줄 것. 교사의 확신에 찬 지식을 통해 학생들은 권위를 인정해줄 것이다.
최근 체육교사 수업 나눔 모임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일종의 품앗이처럼 여러 학교의 체육교사들이 모여서 각자 자신 있는 종목을 골라 다른 학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수업한다. 이 자리는 기능 연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종목에서 수업에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과제를 공유한다. 노하우가 쌓여 정교하게 설계된 교수법을 서로 나누면서 도움을 주고받는다. 나는 이 모임에서 배드민턴 수업 방법에 큰 힌트를 얻었다.
코로나 19 방역대책이 완화되면서 학교스포츠클럽대회나 체육대회가 다시 활성화되었다. 체육 교사들이 다시 활발하게 움직일 기회가 온 것이다. 이런 이벤트들은 많은 예산이 투입된 체육교과의 큰 사업이다. 이 기회를 잘 활용하면 체육교사의 전문성을 발휘하여 학생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 완벽하지 않은 체육교사들 파이팅!
p.s. 오늘 학생과 배드민턴 시합을 했는데 듀스까지 가서 겨우 이겼다. 이 녀석은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나를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중학생이더라도 꽤 잘하는 녀석이라면 체육선생님이 질 수도 있다. 그래도 열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