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것은 나 혼자만의 일이다. 이별하는 것, 미워하는 것, 기쁨, 질투, 용서, 그리고 슬픔도 모두 나 혼자만의 일이다. 누군가를 또는 대상을 향하고 마주하는 듯 하지만 그것을 통해 나 자신을 향하고 마주하며 결국은 나 자신과의 관계만 남게 된다.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에 자존감을 채우는 것보다, 내가 누군가를 힘껏 사랑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혼자 하는 것들이 늘어남을 바라보며 내가 연애에 실패한 이유인가, 나이가 들며 더 따지게 되어 어려운 것인가 싶다.
30살 어느 날, 나이가 들며 따지는 게 많아졌음을 스스로 느꼈다는 푸념에 소꿉친구에게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구분이 생겨서 그렇다는 답변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싫어하고 상처받을 것들에 스스로를 내던지는 일이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란 말이다. 날 행복하게, 또는 슬프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이라 분명하게 답하지 못해도 몸이 기억하고 있다.
내가 사랑했던 그 사람은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한, 한 번도 그 사람을 싫다는 사람을 본 적 없었다. 색이 진해 호불호가 강한 나 스스로가 그 사람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단 갈증을 느꼈었다. 누구에게나 무난한 그가 나에게만 좋은 사람이 되길 바랐던 내 욕심 때문에 져버린 그 연애가 끝나며 나는 다시는 모두에게 착한 사람과, 우유부단한 사람과 연애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얼마 전 소개팅에서 만난 착하지만 우유부단했던 그 사람에게 거절의 인사를 전했다. 이제 나는 본능적으로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결단이 어려운 사람은 함께 걷는 속도를 맞출 수 없다고 생각하고 피하기 시작했다. 정작 만남을 시작하면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굳이 끝이 보이는 연애를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이상형은 없지만 피해야 하는 소거법은 적용되었다.
영상을 보며 혼자 밥 먹는 것을 좋아한다. 나만의 공간에서 혼자 반주하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혼밥, 혼술, 혼여… 이젠 상처받는 것들이 싫어서, 혹은 내가 편한 템포를 알아 혼자 하는 것들이 늘어났다. 상대의 식사 속도에 맞추다 체하거나, 짠을 언제 해야 하나, 무슨 얘기를 해야 재밌는 분위기가 이어질까 고민하는 날들이 적어졌다. 새로운 것보단 익숙한 것들에 몸이 먼저 가는 날들이다. 그러다 미친 듯이 외로움에 시달릴 때가 있는데, 이 또한 시간이 지나가면 무뎌진다. 고열을 앓고 낫고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이젠 술자리에서 어떤 술을 주문해야 하나 고민하고 눈치 보는 것보단 퇴근길 편의점에서 그날의 기분에 맞는 술과 안주를 고르는 것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어떤 술을 좋아하냔 질문에 되묻거나 뭐든 좋다고 말하는 나를 찾기 드물어졌다.
나는 혼자 하는 것들이 늘어나는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