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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근이 Oct 23. 2020

05. 그때 그를 만났다

나를 움직였던 꿈 이야기

#1.


2011년 그 해 연말, 참 많은 일들을 겪었다. 마음이 심란했고, 허전했다. 일하는 것도 힘들고 지쳤고, 또다시 하루하루 불평불만을 가득 쌓아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어디로 떠날 용기는 없었기에 자리를 지키고서 멍하니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뭐라도 좋으니 새로운 것을 시작해야겠다 싶었다. 포털 사이트에서 동호회 목록을 몇 페이지씩 넘겨가면서 뒤적거리다가 드디어 마음에 딱 드는 곳을 발견했다. 그냥 사람들만 만나는 동호회 말고 무언가를 배우고 즐길 수 있는 곳을 찾고 싶었는데, 때마침 한 동호회에서 1월 첫 모임부터 참석할 신입 회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바로 연락해서 함께 나가보자고 했다. 



동호회의 좋은 점은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서 좋아하는 취미를 즐길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배경에서 온 취미가 같은 사람들을 만나서 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재밌는 건 그 둘 중에서 '사람 만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오는 사람들 비율이 더 크다는 것이다. 



첫 두 달 동안, 일주일에 두세 번씩 모임에 나가서 배울 정도로 취미 생활을 정말 열심히 했다. 민망한 이야기지만 그러는 동안 남자 회원들이 이상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표현해와서, 어떻게 하면 잘 거절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할 정도였다. 내가 예쁘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라 이십 대 후반의 싱글인 여자 회원 중에 동호회 모임에 그렇게까지 열심히 나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2.


그 사람, B를 처음 만난 것은 2012년 1월, 그 동호회의 첫 모임에서였다. 사실 그 날 30명이 넘는 사람을 처음 만났기 때문에 그를 본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이후로 그 사람도 나만큼이나 모임에 자주 참석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화가 늘어갔다. B는 그 모임에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취미 생활'을 위해서 오는 사람이었다. 늘 모자를 눌러쓰고, 패딩 점퍼를 입고, 한편에서 열심히 연습만 하다 가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조금 친해진 몇몇 사람들이 모여 밥을 먹는 자리에서 B가 호주에 대한 이야기를 가볍게 꺼냈다. 계속해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나의 마음에 그때 처음으로 '호주'가 들어왔다. 나와 내 친구가 호주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자 그는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했다. 2년의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끝내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호주에서 다닐 학교를 위해 IELTS라는 영어 시험을 준비했고, 입학에 필요한 점수를 받은 뒤 학교 등록까지 마친 상태라고 했다. 이미 6월에 호주로 가는 비행기를 끊어놓았고, 떠나기 전에 남은 시간 동안 잠깐 배울 수 있는 무언가를 찾다가 그 동호회에 왔던 거란다. 그동안 사람들을 새로 사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던 그의 모습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내가 호주 이야기에 큰 관심을 보이자 B는 '호주로 간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서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얼마나 오래 걸리든 상관없으니, 내가 밤을 새워서 해도 좋았던 것, 평생 하고 살고 싶은 것을 생각해보라 했다. 나의 '꿈'을 생각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그것이 정해지면 그다음부터는 쉽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의 현재 목표와 거기까지 가기 위해 세워놓은 계획들도 이야기해주었다. 그런 B에게 나는 "이런 사람은 처음 본다."라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꿈과 행복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 꿈에 대한 소신과 계획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고, 실제로 그 생각대로 움직이는 사람을 직접 만난 것이 정말로 처음이었다. 그때 우리는 남자와 여자로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B가 내가 휘청거릴 때 옆에서 똑바로 붙잡아줄 것 같은 사람이라는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도 많이 혼란스럽고 힘들었던 시기에 그런 사람을 딱 만났던 것이다.








#3.


시간이 조금 더 지나 B가 호주로 갈 날이 가까워오고 있을 때 우리가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는 내 꿈을 빨리 정하라고 보채지 않았고, 일단 호주로 같이 가보자고 잡지도 않았고, 그리고 6월에 떠날 그의 일정을 미루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때 '호주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확신이 생겼다.



마음을 정했던 5월 한 달간 우리는 참 많이 바빴고, 6월 초 그는 먼저 호주로 떠났다. 나는 하던 일을 천천히 그만두고 준비를 차근차근해서 12월쯤에 호주로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이미 그곳에 가 있어서, 하루라도 더 빨리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7월 초에 10월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리고, 7월 말에 수수료를 내고 9월 비행기로 당겨버렸다.  






결국 내가 호주로 오도록 움직인 가장 큰 동기는 아주 심플하다. 나는 한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 사람과 '꿈'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는 '꿈'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길을 '생각'했던 사람이었고, 그 생각을 따라 정말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나도 그 사람처럼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지금, 그 사람 때문에 나는 꿈에 한 발 다가 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지금까지 적었던, 그리고 적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뒤로하고 '결국 남자 때문에 호주로 간 거네?'라고 누군가 말한다고 해도 나는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에게 지금 호주가 왜 좋냐고 묻는다면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정말 수없이 많고 많겠지만, 그 사람을 만나기 전의 나는 호주를 몰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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