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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근이 Oct 24. 2020

06. 모두가 가지 못할 거라고 말하는 길

유학을 하지 않기로 한 이유

#1. 


호주로 떠나기로 마음을 정하 고나니 오랜만에 바빠졌다. 



내가 정말 원하는 삶, 나의 꿈으로 다가가는 길을 고민하다 보니 중간 디딤돌이 꼭 필요했다. 바로, 호주에서 지낼 수 있는 '장기 비자'였다. 처음엔 호주에서 다시 대학을 다니면서 공부를 하려고 생각했다. 꼭 약대가 아니라 다른 공부를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유학원에서 말하길, 한국에서 들었던 대학 과목들의 정보를 호주 대학에 제출하면 수강하려는 코스에서 유사하다고 판단되는 과목에 대한 "credit"을 인정받고 해당 과목을 수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를 통해서 전체 수강 기간을 1학기~1년 정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이왕이면 한국에서 들었던 전공과목들 중 일부가 인정이 되는 과를 선택하는 편이 좋을 것 같기도 해서 약대(Pharmacy)와 임상병리학과(Medical Laboratory Science) 두 가지 옵션을 고려해보았다. 임상병리학과의 경우 약대보다 입학에 필요한 영어시험 점수는 더 낮았지만 학비가 더 비싸고 내가 인정받을 수 있는 credit도 더 적을 것이라 했다. 유학원에서 나에게 약대 유학을 더 권했던 이유였다.







어느 쪽으로 가겠다고 마음을 확실히 결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민하는 동안 우선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해보기로 했다. 영문 졸업증명서, 영문 성적증명서는 학교 웹사이트에서 수수료 없이 인쇄 가능했다. 병원 경력증명서는 총무과에 찾아가서 발급받았고, 약국은 공식적인 서류가 없었기 때문에 직접 작성하여 약국 직인을 받았다. 



가장 일이 많았던 것은 영문 Syllabus(강의계획서)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동일 과목에 대한 credit을 인정받으려면 꼭 필요한 서류였다. 요즘은 교수님들이 영문 Syllabus를 온라인에 업로드시켜놓는 것이 의무처럼 되어있는 것 같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땐 아니었기 때문에, 없는 자료를 일일이 찾아내고 만들어내느라 고생 좀 했다. 모든 학기의 모든 과목을 편집하고 출력하니 50여 페이지에 달했다. 출력한 Syllabus를 들고 학교 총무과로 찾아가서 학과장님과 단과대학장님의 직인을 받아 직접 모든 페이지에 다 찍어왔다. 



준비하던 서류들 2012









#2.


결국 나의 생각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역시나 돈이었다. 만약 임상병리학과를 선택하여 1학기에 해당하는 credit을 받을 수 있다면 3년 반 동안 학교를 다녀야 하니, $13,000*7학기=$91,000, 당시 환율인 1200원으로 학비만 1억 원 넘게 든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리고 약대를 가서 1년 credit을 인정받아 3년을 학교를 다닌다 해도 9천만 원 정도였다. 정말 어마 무시한 학비. 이 선택이 나에게 이만큼의 돈과 시간을 쏟을 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싶었다.



다른 길은 없을까 계속 고민하다 유학원을 통하지 않고 직접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해외 약사가 호주에서 약사 등록을 하는 절차에 '호주 학위'가 없어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다른 전공으로 공부를 하고 싶은 거면 몰라도, 적어도 호주에서 약대를 다시 다닐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조금만 검색해보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정보였지만 유학원에서는 말해주지 않았던 사실이다. 



호주에서 한국 학력과 약사 경력을 인정받고 약사가 되기 위한 첫 단계에서 필요했던 것은 1. 서류심사 2. 영어점수 3. 호주약사 예비시험 (기초 약학 시험) 통과, 이렇게 세 가지였다. 이 단계를 무사히 통과하면 호주에서 일하면서 장기로 머무를 수 있는 비자도 신청할 수 있었다. (2012년 기준) 요구되는 영어 점수는 IELTS overall 7.5,  each 7.0라고 되어있었다. IELTS라는 시험의 존재도 모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점수인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3년 이상 학교를 다니고 1억 원 가까이 학비를 들이는 것보다는 이 길로 가는 것이 시간과 돈을 더 절약해줄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문제는 이 과정이 실제로 가능한 길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여러 유학원, 이민대행사에 전화로 문의를 해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부분을 설명하면서 유학 없이 호주 약사 이민이 가능한지 알고 싶다고 물었을 때 돌아오는 답변은 세 종류였다. "안됩니다.", "모릅니다.", 캐나다로 가시는 건 어떠세요?" 그렇다고 해서 '안 되는구나' 단념하지는 않았다. 뭐 한국 약사들 중 호주로 이민 가려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정보가 없나 보다 생각했고, 호주 현지에 가서 알아보면 다른 답을 하는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3.


호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다들 입 모아 권하던 대로 '유학'을 선택했을 때의 장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끌어줄 선생님이 있고, 함께 공부할 친구들도 있으니 공부하다 길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혼자 준비하는 것보다는 영어도 더 많이 늘 수 있는 환경일 것이다. 그런데 나의 상황에 더 잘 맞는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버렸으니, 한 번 도전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계속 오락가락했지만, 조금씩 유학을 하지 않는 쪽으로 더 기울어져갔다.



학교를 가든, 혼자 준비하든, 모든 선택에 있어서 분명했던 한 가지는 "IELTS"라는 영어시험 점수가 필요한 조건이라는 것이었기에 바로 학원부터 등록했다. 일하고 있던 약국에도 호주로 가려고 한다며, 후임을 구할 수 있도록 한 달 전에 알렸다. 



사장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식사 자리에서, 1년 넘는 동안 회식도 한 번 못했다며 아쉬워하셨다. "내랑 성격도 비슷한 데가 많아서 나중에 약국 차리면 잘할 텐데 말이야. 여기서 3년 정도 일하면 본인 약국 차릴 수 있을 거고, 그러고 나서 5년 정도만 잘 버티면 나중엔 편하게 일할 수 있을 텐데 왜 갈려고 하노..." 쉬운 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을 찾아간다고 하셨다. 이런 내가 바보같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은 일단 떠나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나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정해진 것 없이 호주행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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