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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근이 Oct 23. 2020

04. 흥미와 열정사이

어느 캐나다 약사의 조언

2011년 10월. 




풀타임 약사로 일을 시작한 지 4개월 차, 시간은 참 잘도 흘러서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병원을 나선 지 열 달이 훌쩍 지나있었다. 나와는 나이 차이가 조금 많이 나는 사촌 언니의 딸, 언제 그렇게 컸는지 고3이 된 조카와 마주 앉아 대학입시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는 벌써 약사고시 12과목을 모두 나열하기 힘든 연차였다. 



내가 하는 말을 노트에 열심히 받아 적고 있는 조카에게 약대에 왜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사실은 엄마가..."라며 말끝을 흐리더니 "이모는 왜 약대에 간 거냐"라고 되물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수능 점수 맞춰서.."라고 말하고 그냥 웃었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대학교, 현재까지 쭉 돌아본 시간.. 나름 재미있는 대화였다.










"만 백 원입니다."



조제된 처방약을 내어주며 말하자, 문신이 크게 있는 남자 손님이 아주 기분 나쁜 목소리로 "백원은 뭡니까?"라고 했다. "백원은 백원인데요...." 하고 싶었다 정말. 처방전 약값은 약국에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계산되어 나오는 것인데 "... 100원"이라고 하면 이런 일이 생각보다 자주 생겼다. 어떤 인상 좋으신 할머님께서는 "만 팔백 원입니다."라고 했더니 웃으시면서 "팔백 원은 안 준다." 하셨다. 그러면서 의사 아들이 일하는 병원 자랑도 하셨다..... 왜죠?



약국에서 바쁜 시간은 폭풍처럼 지나가지만, 한가한 타이밍이 오면 정말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약국에서 이렇게 일하는 것 역시 내가 살고 싶은 미래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4년이 걸렸던 판단이, 이제 4개월 만에 뚜렷해졌다. 또다시 더 나은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 움직여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1년 전에 생각만 했다가 그냥 접어두고 지냈던 '캐나다 약사'에 대해서 다시 알아보기로 했다. 기본적인 과정에 대한 조사를 한 다음, 캐나다에서 일하고 있던 대학 동기 언니에게 오랜만에 연락했다. 캐나다에 내년에는 정말 꼭 가고 싶다고, 거기서 지내는 것은 어떤지 알고 싶다며 메시지를 보냈다. 고맙게도 막연했던 캐나다행 계획에 대해 정말 꿀 같은 조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는 내가 아는 게 너무 없어서, '우와 정말 힘들겠구나, 언니 정말 대단하다.' 정도로만 받아들였었는데, 지금 와서 그 메시지를 다시 보니 해외 이민이나 취업에 도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진짜 도움되는 조언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 사는 거야 어디든 다 똑같으니 뭐.. 캐나다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면 어학연수로라도 한번 와서 조금 지내다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와서 한번 보고 가는 게 내가 백 마디 하는 것보다 더 도움될 거야. 캐나다 약사 시험을 준비하려는 거라면.. 글쎄,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 ㅎㅎ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느낌이랄까.. 생각보다 돈과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일이라서 쉽게 추천하지는 못하겠어. 막상 여기와 서는 언어와 문화와 나 자신에게 항상 도전해야 해서. 진짜 네가 시험을 치려는 이유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거라면 그냥 와서 잠시 바람 쐬고 가는 것이 괜찮은 것 같아. 시험을 치려는 이유를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고 알려줘."




지금 누군가 호주 약사 시험을 준비하고 싶다고 연락한다면 나도 언니와 똑같이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냥 흥미만 가지고 내린 결정으로, '하다 안 되면 돌아가면 된다'는 마음으로 출발한다면, 끝까지 가기 힘든 길이라고.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면 정말 강한 동기가 필요하니, 잘 생각해보라고.



정말로 진지하게 캐나다 약사 시험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답장을 보냈을 때, 언니가 캐나다에서 풀타임 약사로 일하게 되기까지 지난 3년 반 동안 걸어왔던 길을 장문의 쪽지 네 개 분량으로 알려주었다. 미리 어느 정도 알아봤던 내용으로 쉽지 않은 과정일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준비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길고, 더 어려운 길이었다. 읽고 또 읽고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나는 못 할 것 같았다. 홀로 그 길로 들어서서 끝까지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때 나는 그 길이 두려웠던 것이다. 무모하게 시작해놓고 볼 만큼 충분한 열정이 없었다. 



그렇게 또 한 해가 넘어갔고, 

2012년 초 나에게는 드디어 '동기'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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