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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근이 Oct 21. 2020

02. 더 나은 세상은 반드시 있다.

병원 약사를 그만두면서


병원 약제국을 그만두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과장님을 찾아가 "그만두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 처음에는 이유를 물으시고, 그다음엔 좀 더 생각해보라 하시고, 다음번에 찾아가면 정 그러면 6개월 뒤에 그만두라고 하시고... 그런 과정 속에서 시간을 계속 보내다가 생각을 다시 돌리는 약사들도 있었다.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그런 게 어딨냐고 했다. 내가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하고 안 나가면 끝인 거지, 못 그만두는 게 어디 있냐며.



사실 가끔 병원 약제 국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학생들 중에 진짜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 마치 학부모처럼 전화해서 오늘 딸이 아파서 결근한다고 말해주기도 했고, 아침에 결근을 해서 집에 연락해보니 어머니가 아들 군대에 갔다고 이야기해서 황당했던 적도 있다. 지각은 물론이고 일하는 중간중간에 말없이 사라졌다가 30-40분 뒤에 돌아와서는 산책하고 왔다고 하면서 일을 제대로 안 했던 밤 당직 아르바이트생은, 다들 잘라야 하는 거 아닌가 이야기했을 정도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과장님 방으로 걸어 들어가 "그만둘게요. 여기 약사들은 다 자기가 사장인 줄 알아요." 하며 먼저 병원을 나갔다. 



그렇지만 나는 철없는 아르바이트생이 아니었다. 병원을 그만두고 나가서 다시는 병원에서 일을 안 하면 되는 그런 문제도 아니었다. 그냥 마음이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그만두겠다는 마음을 처음 먹은 것은 4월이었지만, 맡고 있던 항암제 파트를 끝내고 후배 약사를 트레이닝시켜주려면 12월까지는 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려 8개월을 더 일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제대로 된 절차대로 잘 정리하고 그만두고 싶었다. 5월엔 우선 부모님께 그만두겠다는 뜻을 말씀드렸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병원에 다녔으면 하셨었지만, 다른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내 결정에 크게 반대하지도 않으셨다. 



8월까지 기다렸다가 과장님을 찾아가서 "12월까지만 일하겠다"라고 말씀드렸다. "캐나다에 가서 영어 공부도 하고 다른 경험들도 하고 싶다"라는 나의 말에 과장님은 조금 어이없어하시며 웃으셨지만, 바로 안 된다고 하시진 않고 신입 약사 들어오는 2월까지는 일해 보는 게 어떻겠냐 하셨다. "1월부터 새 마음 새 뜻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다"라고 말씀드리자, 과장님은 "그래 한번 생각해보자." 하셨다. 그때 당시 약사 정원이 꽉 차있어서 약국 사정이 그리 어렵지 않아서인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긍정적인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뭔가 열린 결말스러웠지만 그래도 병원에 알렸으니 어쨌든 그만둘 것은 정해졌던 것이다. 그 후로 병원일은 더 이상 나의 일이 아니었기에, 마음의 시간은 너무나도 더디게 흘러 한참만에 11월 말이 왔고, 그때 과장님께 한 번 더 확인을 받았다. 과장님은 내심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셨다는 듯 "진짜로 그만두게?" 하셨다. 



그렇게 나는 2010년 12월 31일, 부러워하는 동기들을 뒤로하고 제일 먼저 병원을 나왔다.






병원을 그만두겠다는 이유로 왜 캐나다로 가고 싶다는 말을 했을까? 


진짜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는 아니었다. 주변에서 캐나다 약사 시험공부를 하는 약사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고, 고등학교 선배이자 대학 동기였던 언니 한 명도 그 당시에 캐나다에서 약사로 일하고 있었다. 뚜렷이 보이는 멋진 길이었기에, 막연히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본 적이 있는 정도였다. 그냥 그만 두기 위한 하나의 핑계였을 수도 있다.



그 후로 종종 병원 동기들을 만날 때면 다들 내 얼굴이 좋아졌다고 했고, 부럽다고 했다. 부럽다는 말은 내가 병원을 나오기로 결정하고 주위에 말을 하기 시작한 5월부터, 그만두고 나온 12월, 그리고 그 뒤로도 쭉 들을 수 있었다. 그만두기 전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먼저 문 열고 나가서 그 문 안 닫고 기다릴 테니 모두 따라 나오라"라고 이야기하곤 했었고, 병원을 그만두고 나서는 진심으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그만두라"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힘들다고 하면서도 병원에 계속 남아있었다.



"나간다고 뭐가 달라질까?" 



대부분이 하는 생각이었다. 병원을 나와서 약국에서 일하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해도 힘든 건 마찬가지일 텐데, 무작정 그만둬서 뭐하냐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 마음으로 나도 4년을 다녔고, 그런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결혼할 때까지만, 아기 가질 때까지만 하면서 남아있게 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졌다. "나가면"이 아니라 "남아있으면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를 생각해보았다. 내가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그 직장에 남아있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면, 힘들어도 참고 버티면 그것은 나에게 경력이 되고, 승진이 되고, 그렇게 하나하나 이루어가면서 나의 목표를 달성하는 길이 되겠지.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내가 언제 그만둘지는 모르겠지만 그만두긴 해야지 하는 생각이라면, 그곳에 남아있는 시간 하루하루가 내 남은 삶에 있어서 마이너스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와 정말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사실은.. "나오면 달라진다"는 것이다.



무엇이 달라지는지는 앞으로 계속 이야기하겠지만, 가장 심플한 것부터 달라진다. 나의 동기들은 그 후에도 만나면 계속해서 병원일 이야기뿐이었지만, 그 일들은 병원을 나온 순간부터 내게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그 안에 있을 때만 그 일들이 크나큰 스트레스이지, 한 발만 나오면 정말 별것도 아닌 것들이었다. 



나에게는 여유가 생겼고,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이 최고는 아닐지라도, 그전 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그 뒤에 또 더 나은 세상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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