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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근이 Oct 22. 2020

03. 한국에서 약사는 좋은 직업일까?

약국 이야기


병원을 그만두고 나올 땐 금방이라도 뭔가 대단한 도전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첫 두 달을 집에서 푹 쉬고, 다음 세 달을 동네의 조용한 약국에서 주 20시간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여유롭게 보내다 보니, 어디론가 떠나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던 마음이 무뎌졌다. 그러다 시내 한가운데, 메디컬 센터로 둘러싸여 있는 약국에서 다른 약국보다 급여를 조금 더 많이 받고, 1년 이후부터 퇴직금을  받는 조건으로 풀타임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시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2011-2012


이 약국은 특이하게도 약국 개설 등록자가 '약사'가 아닌 '한약사'였는데, 약사법에 약국을 개설할 수 있는 자는 '약사' 또는 '한약사'라고 명시되어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는 없지만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약사고시를 칠 때 약사법을 공부했지만, 여기서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눈여겨본 적이 없는 문장이었다. 물론, 약조제와 복약지도는 한약사가 아닌 약사의 업무이기 때문에 약국 개설자가 한약사인 약국에도 항상 약사가 근무하고 있어야 하고, 당연히 한약사는 약사의 업무를 할 수 없다. 약국에 등록된 약사는 나 혼자였기 때문에 일요일 공휴일을 제외한 약국이 문 여는 날은 모두 약국을 지켰다.



약국은 때로는 손님이 몰려 많이 바빴지만 병원보다 바쁘진 않았고,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이 역시 병원만큼은 아니었다. 낯설었던 일에 적응하고 편해지기까지도 몇 주가 걸리지 않았다. 단조롭지만 안정적인 그 일상이 처음엔 퍽 만족스러웠다. 어쩌다 보니 보험도 몇 개 새로 들었고, 안정적으로 1년, 2년, 3년.. 그렇게 쭉 흘러갈 것 같았다.








하지만 약국에서 일하는 동안, 나에겐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나는 약사를 계속할 것인가?


이것은 병원에 다닐 때에는 해보지 못했던 그런 근본적인 고민이었다.




병원에서는 약사로 일하긴 했지만, 어떻게 보면 회사에 속해있는 회사원처럼, 어떤 틀 안에서 주어진 업무를 잘 수행하면 되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병원과는 달리 약국은 주 업무가 "조제"와 "복약상담"이었고, 약사 개인으로 모든 것을 책임지고 약국 손님들을 직접 대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그러다 보니, 병원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약사라는 직업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들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고, 약사로서 할 수 있는 직무의 한계에 대해서도 매일매일 느끼게 되었다.



그때 당시 약국에서 느꼈던 생각과 고민들을 수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글로 다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대부분은 약사가 아니라 약국을 찾는 손님의 입장일 텐데 이런 이야기에 공감이나 이해를 많이 받을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유들로 약국에서 일했던 경험담은 그냥 건너뛸까도 생각했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이 내가 호주로 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기 때문에, 왜 한국에서 약사로 일하는 것에 회의감을 느꼈는지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이야기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우선 매일매일 피부로 느껴졌다고 한 '약사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한국에서는 약사라는 직업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은 직업'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막상 약사들을 볼 때에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다. 약사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이미 꽤 굳어져 있어서 약사 개개인들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바꾸기가 쉽지 않다. 이는 일부 약사들이 해온 잘못들이 쌓여서 나온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제도적으로 약사들이 '약의 전문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복약 설명 중에 말 끊고 '얼마예요' 하는 손님, 증상에 대해 질문하는데 '그냥 XXX 하나만 달라고요' 하는 손님, 증상에 맞는 일반약과 영양제를 권하면 장사한다고 욕하는 손님, 동일 성분인 다른 제약회사 약으로 대체 조제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면 더 싼 약으로 마진을 많이 남기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손님, 무슨 일이든지 무조건 병원에 연락해서 의사 허락부터 받으라고 말하는 손님, 약사는 의사 처방대로 약만 지어주거나 손님이 달라는 약만 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손님들...  



대학에서 약에 대해서 4년 동안 공부했고, 병원 약제국에서 일한 4년 동안도 1년에 3-4회씩 시험 쳐가며 계속 공부 해왔는데도, 약국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으로 그곳에 서 있는지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약을 조제해주고, 약에 대해 설명해주고, 상담을 해주어도 고마워하지 않았고, 불만을 가졌고, 대놓고 무례하게 행동했다.






* 친절하라. 왜냐하면 당신이 만나는 사람 대다수는 지금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




약국이 한가해질 때면 인터넷으로 약국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곤 했는데, 항상 날 선 댓글들이 가득해서 속상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인터넷 창을 끄기 일수였다. 기사 내용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던 "약사들은 왜 다 불친절하지?"라는 댓글을 본 적이 있다. 그 사람이 진짜 평생 불친절한 약사들만 만났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많은 약사들은 친절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항상 친절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나 역시도 매일 아침 '오늘은 더 친절하게 대해야지, 어떤 경우에도 잘 참아야지' 다짐을 하고 일을 시작했지만, 그 마음을 다잡기 힘든 날이 많았다.



아프고, 힘들고, 약한 사람들이 약국에만 오면 (특히 약사가 젊은 여자일 때) 왜 그렇게 목소리가 강해지는지, 왜 그렇게 다들 화가 나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막무가내인 손님들을 대하면서 똑같이 큰 소리를 내며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죽했으면 잠깐씩 약국에 나오셔서 앉아있다 가시던 우리 약국장님의 아버지(라고 적고 사장님이라고 부른다)께서 뒤에서 보다 못해 손님에게 "보소! 그만하고 가이소!"라고 하신 적도 있다. 씩씩거리던 손님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남자의 말을 듣고서 그제야 약국 문을 나서자, 사장님은 "아니 무슨 약사들이 죄 지었나! 약 받으러 와서 왜 저라노."라며 대신 화를 내주셨다.



소위 '진상' 손님을 한 명 만날 때마다 소리 없이 속으로만 화를 내다보면 오후, 저녁이 될수록 점점 진이 다 빠져나간다. 그런 상황을 극복해보려고 '한 명에게 당하고 나면 그다음 손님에게는 더 친절하려고 노력하기' 작전을 써보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인지라, 한결같은 미소를 하루 종일 유지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약사 같은 거 필요 없다.



모든 댓글을 다 모아 압축해서 날리는 카운트 펀치 같은 댓글이었다. 정말 약사라는 직업을 없애고 싶어 하는 곳이 한국 사회인 것처럼 느껴졌다.



곧 화학과 수시 면접을 앞두고 있고, 나중에 약대에 진학하고 싶다는 고3 조카가 면접 전에 나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연락이 왔을 때, 나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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