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해외 생활 시작
2012년 9월 8일 오후
김해공항에서 가족과 친구들, 그 친구들의 남친과 남편들의 배웅까지 받으며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 오지 못한 친구들도 미안하다며 연락을 해왔다. 내 사람들의 따뜻한 그늘에서 벗어나는 기분이 들어 그제야 떠난다는 실감이 났다. 하지만 혼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도착한 브리즈번 공항에는 B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 달 동안 스카이프로만 보던 얼굴을 브리즈번에서 다시 만나 눈으로 보니 왠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정말... 호주로 온 것이다.
공항에서 벗어나 다시 만난 브리즈번은 몇 년 전 여행으로 잠시 들렀던 브리즈번 도심의 바쁜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보라색 자카란다 꽃들이 따뜻한 아침햇살을 담뿍 받고 있었고, 한산한 길 양옆으로는 1,2층짜리 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었다. 여행 중에 골드코스트로 가기 위해,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한번 더 들렀던 중간지, 그것뿐이었던 그 도시에서 내가 살게 되다니... 달리는 차창밖으로 낯선 풍경들을 바라보며 감회가 새로웠다.
공항에서 20분쯤 달린 차가 예쁜 집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그날부터 브리즈번을 떠나기 전까지, 3년 동안 살게 된 타운하우스였다. B는 내가 호주로 오기 전부터 집이 많이 낡았다며 연신 겁을 줬었지만, 이 오래된 집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특히 햇볕이 가득 들어오는 뒤뜰과 부엌이 참 좋았다. 바삭하게 마른빨래를 걷는 기분마저도 상쾌했다. 늦은 아침, 집에 같이 사는 사람들이 모두 학교에 가거나 일하러 가고 나면 혼자서 부엌에 앉아 마시는 커피가, 믹스커피일 뿐인데도 그렇게 맛있었다. 바쁘고 시끄러웠던 곳에서 벗어나, 할 일없이 보내는 그 여유로운 시간이 그저 좋았다.
처음이라 그런 거지, 익숙해져서 일상이 되어버리고 나면 이 시간도 다 아무것도 아닌 게 되진 않을까 했었지만, 다행히 브리즈번을 떠날 때까지 쭉 나는 그 시간을 즐기며 집에서 혼자 참 잘 지냈다. 며칠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을 때도 많았는데 전혀 답답해하거나 심심해하지 않았다. 한국에 있을 땐 내가 꽤나 외향적이고 사회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 반대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브리즈번에 도착한 지 1달 뒤부터 시내에 있는 IELTS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한국에 있을 때를 돌아보면 몸도 바빴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의 비중이 너무 컸기 때문에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아서 마음 편히 공부에만 집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브리즈번은 나에게 공부하기에 참 좋은 곳이었다. 평일엔 늘 학원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고, 주말에는 가끔 근교로 여행도 다니고, 캠핑도 하며 머리를 식혔다.
나는 브리즈번의, 아니 호주의 도서관들을 정말 좋아한다. 브리즈번에서 살기 시작하고 처음 1년간 집 이외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 도서관이다. 호주에서 도서관은 어린아이들, 학생들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장소다. 도시 곳곳에 시민들을 위한 무료 도서관이 많이 있는데, 특히 브리즈번 도시 중심인 퀸 스트릿에 있는 알록달록 예쁘고 활기찬 Brisbane Square Library와 싸우스 뱅크에 있는 모던하고 깔끔한, 공부하기 딱 좋은 분위기의 State Library of Queensland 두 곳은 정말 그대로 들어내어서 나의 고향에 옮겨 심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도서관과 학원에 갈 때 나는 혼자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25분 동안 버스 안과 밖을 바라보며 이 여유로운 나라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했다. 브리즈번의 버스는 시간표에 맞추어 운행을 하는데,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차가 가능한 정류장에서는 시간표보다 빨리 도착한 버스가 멈춰 서서 잠시 사람들을 기다려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브리즈번의 버스는 한국보다 크고, 두 칸이 붙어있는 긴 버스도 있으며, 창문은 열 수 없지만 갑갑하지 않고 항상 에어컨이나 히터가 가동 중이라 쾌적한 편이다. 버스는 높이가 조절되어 유모차나 휠체어도 쉽게 올라탈 수 있고, 노약자석의 의자를 접어서 공간이 생기기 때문에 안전하게 갈 수 있다. 버스를 내릴 때에는 아무도 서두르지 않으며 뒷문과 앞문 상관없이 어디로 내려도 괜찮다. 버스를 탈 때 기사와 승객이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내릴 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러를 통해 기사와 눈을 마주치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내리는데, 나는 이 문화가 참 좋다.
버스에서는 안내방송을 해주지 않고, 노선표도 붙어있지 않지만 그 이유 때문에 버스기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그것 또한 좋다고 생각했다. 처음 가는 길은 모바일 내비게이션을 보고 있어도 불안하여 맨 앞자리에 앉아 기사님께 내릴 곳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어떤 기사 아저씨들은 그런 나에게 여행 온 거냐며 가는 길에 이런저런 말도 걸어주셨다. 뭐, 버스비가 좀 많이 비싸고, 항상 천천히 다녀서 속 터질 때도 있고, 가끔은 시간표에는 있는 버스가 예고 없이 안 오기도 했지만...... 이런 버스를 타고 천천히 다니는 것이 나는 꽤 괜찮았다.
그렇게 브리즈번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익숙해지면서 이곳에 점점 정이 들어갔다. 여행 같은 특별한 날들이 서서히 보통날이 되어가는 그 느낌이 좋았다. 여기에서 남들처럼 평범하게 일하고 사랑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