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시험 이야기
#1.
한국에서 한 달, 그리고 브리즈번에서 두 달의 수업을 들어보았지만 나에게 IELTS 시험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와 같았다. 내 실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지, 나의 목표 점수인 'each 7.0 이상, overall 7.5 이상'은 얼마큼 어려운 점수인지, 실제로 시험을 쳐보기 전까지는 절대 모를 것 같았다. 8주의 학원 과정이 끝나자마자 최대한 빠른 시험으로 등록하려 했는데 연말에 응시자가 몰리는 탓에 12월에는 남은 자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듬해 1월 첫 시험으로 등록했다.
한 번에 $330라는 듣도보도 못한 비싼 응시료에 먼저 놀랐고, 시험 접수를 하기 위해서 시험장에 직접 찾아가서 신청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게다가 접수처에 신청서를 냈더니 응시료 결제하는 곳이 다른 건물에 있으니 가서 수납을 하고 다시 돌아오라는 것 아닌가. 사람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하게 만들고 하여간 진짜 비효율적인 시스템이었다.
나중에 온라인 접수가 가능해졌을 때에도, 결제를 위해서 이메일로 받은 신청서를 프린트 후 신용카드번호를 손으로 적고 사인을 하고 다시 스캔을 해서 답메일로 보내야 하는, 여전히 불편하고 뭔가 많이 부족한 호주 시스템이었다. 한국처럼 빠르고 편한 접수가 가능해지기까지 그 후로도 한참 더 걸렸다.
#2.
12월, 호주는 본격적인 여름으로 들어섰다. 시험을 등록한 뒤 5주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고, 호주에서의 첫여름을 IELTS와 함께 하얗게 불태웠다. 주 1회 받았던 원어민 스피킹 과외 날이면 2시간 동안 쏟아진 랜덤 질문에 대답을 쥐어짜 내느라 진이 다 빠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두통이 올 정도였다. 마음 한쪽에 커다란 짐을 떠안고 있는 신세라... 난생처음 경험한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도, 셰어 식구들과 함께 조용히 맞이한 새해도 맘껏 즐기지 못했다.
첫 시험 날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은데 지워지지가 않는다. 그날, 심하게 많이 긴장했었다. 토익을 비롯해 영어시험이라고는 한국에서도 한 번도 쳐본 적 없는 내가, 외국에서, IELTS라는 생소한 시험을 치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시험장 입구에 늘어선 긴 줄 끝에 서서 차례를 기다려 사진을 찍고, 지문인식기에 손가락 지문을 등록하고, 짐을 맡긴 뒤, 다양한 국적의 수많은 응시자들 틈에 섞여 입실을 기다리는데 너무 긴장한 탓에 배가 살살 아파왔다.
쉬는 시간 없이 이어진 Listening, Reading 시험 시간 동안엔 아주 오래 지난 수능 시험장의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 처음으로 모의고사가 아닌 실전 문제를 풀었을 때의 그 비현실적인 느낌. 혼자 공부하며 문제 풀 때에는 시험장에선 더 집중해서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위안했었는데, 실제로는 더 안 들렸고 더 안 읽혔다. 그 와중에 시간은 어찌나 빨리 흘러가는지.. 이번 시험은 말 그대로, 완전 폭망이었다.
바로 이어서 친 Writing 시험도 역시나 시간에 쫓긴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아, 손에 난 땀 때문에 미끄러지는 연필을 꽉 쥐려다 보니 쥐가 나고 아플 정도였다는 기억도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무표정의 외국인 시험관과 마주 앉아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르는 시간을 보내며 Speaking 파트까지 마치고 나오자 머릿속엔 '내가 지금 $330을 내고 무슨 짓을 한 거지?' 하는 생각만 떠다녔다.
석 달 동안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한 파트도 제대로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IELTS라는 시험은 단지 운에 기대어 좋은 점수를 받길 바랄 수 있는 만만한 시험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첫 시험을 너무 늦지 않게 치고 빨리 정신 차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3.
2주 뒤 성적표가 날아왔다.
Listening 6.5 / Reading 7.0 / Writing 6.0 / Speaking 5.5 = Overall 6.5
IELTS는 각 파트 9.0점이 만점이고, 0.5점 단위로 채점됨. overall은 평균 점수를 말함.
B는 처음 쳐본 것 치고 잘했다고 말했지만, 나의 자신감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목표 점수에서는 평균 1점이 모자란 점수. 거기다 Speaking 점수는 1.5점이나 올려야 하니...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공부를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렇게 공부해서 과연 내가 점수를 올릴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 가득하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도서관에 가고 책상 앞에 앉아 있어 봐도 집중이 되지 않아서 도무지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시험을 친 1월부터 두 달간, 브리즈번에는 거의 매일 비가 왔다. 매일매일이 강수확률 50% 이상이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소나기가 왔다 갔다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잠깐이라도 해가 쨍한 날이면 타운하우스 관리 아저씨는 비를 좀 맞더라도 잔디를 밀어야 했고, 나는 실내에 널어야 하겠지만 그래도 빨래를 돌려야 했다. 그 여름, 장마와 함께 나의 슬럼프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