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은 만들어 가는 것
26살 적부터 자차가 없던 적이 없었는데 올해 초 부득이하게 소유하는 차가 없어졌다.
없어졌다기보다는 마지막 차는 원래 내 차는 아니었지 뭐.
약 12년 전, 26살 때 가양동 중고차 매매단지에 예약도 없이 직접 방문해서 경차 수동으로 사러 왔습니다!라고 차를 보여달라 하고 쥐색의 모닝 수동을 시동을 꺼뜨려가며 집까지 끌고 갔었는데, 그 포부는 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그렇게 구매했던 첫 차인 경차 수동을 몇 년 타다가 준중형으로 바꾸고 또 몇 년 있다가 대형으로 바꿨다가 마지막은 다니던 직장 소유의 SUV까지 운전을 했었는데 서울 웬만한 동네는 내비게이션도 없이 다닐 때마다 서울살이 18년, 서울 사람 다 됐다~라고 생각하며 흐뭇한 생각을 했다.
외식을 하면 반주를 즐겨하는 탓에 쉬는 날에는 차 가지고 나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최근 몇 달간은 차가 없어도 전혀 지장이 없었는데, 본가를 몇일씩 가야 할 때면 개를 데려가는 과정에서 많은 고충이 생겼다.
내년까지는 버티자 버티자 하다가 곧 명절의 긴 연휴도 다가오고 마침 누가 인연처럼 경차에 수동인데 13년이나 되었지만 5만밖에 타지 않은 차를 넘기겠다고 하여 여러모로 도움을 받아 차를 받게 되었다!
나름 대형차에 외제차도 몰아봤는데, 차가 몇 달 없다가 오래된 차라도 다시 내 소유의 차가 생기니 아주 기뻤다.
리모컨 키가 아니라서 운전석 쪽에서 차를 잠가야 4개의 문이 다 잠기고, 기어 변속을 하는 스틱봉 플라스틱은 일부분이 깨지고 내비게이션도 없고, 후방 카메라도 없다. 오로지 라디오 주파수를 깨끗하게 잡는 긴 안테나와 메롱하듯 CD를 낼름거리는 CDP기능만이 있을 뿐. 아 에어백도 조수석까지 있다.
어쨌든 최신 옵션이 없는 차처럼 나 자신에게도 지금 어떠한 옵션이 없는 상태인데 마치 이 차가 나에게 이 시기를 잊지 말고 초심을 새겨주려고 온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요즘 친구들과 그런 얘기를 많이 한다.
절망에 빠질 때마다 늘 껴 있는 절망의 원인이 "나이"라고.
"이 나이에.." ,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데..", "나이 먹고도.." 등등 나이와 당시 상황을 결부시키면 상황에 더욱 초조함과 불안함이 배로 쏟아진다.
뒤돌아 보면 나이를 덜 먹었던 20대 때나, 곧 마흔을 바라보는 30대 후반의 생활에서 달라진 점은 크게 없다.
밥 먹고, 일 하고, 운동하고, 개 산책하고, 책 보고, 친구들 만나고, 데이트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아주 가아아아끔 여행을 가고 등등.
어차피 대부분의 모습이 비슷했고 앞으로도 그럴 텐데 나이가 뭔 상관인가.
잠깐 꼬꾸라지는 에피소드로 인해 가지고 있던 자신의 옵션들이 일부 삭제된 상황이라면 "이 나이에 이렇게 살아",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데 이것도 없네." 같은 생각으로 절망 포인트를 드릴질 해서 파고 들어갈 것이 아니라 밥 한 술 떠먹다가 숟가락을 놓쳐 바닥에 떨어뜨렸는데 바닥에 있던 개털이 숟가락에 묻어서 귀찮지만 새 숟가락을 꺼내와서 이어 밥을 먹는 정도의 에피소드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개가 부러운 것이, 친구네 딸내미나 동생네 아들내미가 입던 티셔츠를 가져와서 아무거나 입혀놔도 본인이 굴욕적인지 모른다는 점인데 또 추가로 그런 점이 개에게 고맙기도 하다.
보호자인 내 모습에 옵션이 얼마나 있는지 관심도 없고 늘 나를 바라봐주니 말이다.
차가 생겼으니 매일 다니는 동네를 벗어나 반려견 놀이터에도 데려가 주고, 더 자주 본가에도 데려가서 여유롭게 머물다 와야지.
차에 필요한 자잘한 옵션들과 인생에 필요할 옵션들을 갖추기 위해 노력은 하겠지만 오늘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더이상 되고 싶지 않다!
순간에 집중하는 연습을 하며 즐겁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