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피하 비치로 파도를 찾아서 떠난, 첫 캠핑 이야기
뉴질랜드에는 파도가 주인인 땅이 있다. 오클랜드 서쪽 해안가로 영화 ‘피아노’의 배경이 되기도 한 곳이다. ‘피아노’는 1993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인데 19세기말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한다. 미혼모인 에이다가 얼굴도 모르는 이와 결혼하기 위해 9살 딸과 함께 영국을 떠나 뉴질랜드에 도착하는데, 수많은 짐들을 제쳐두고 무거운 피아노를 들고 온다. 말을 하지 못하는 그녀는 피아노를 자신의 목소리처럼 여기고 때로는 울부짖음을 대신해 격정적으로 피아노를 연주한다. 에이다가 휘몰아치는 파도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그녀의 딸이 자유롭게 춤을 추는 장면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영화를 보는 내내 파도가 잔상에 남았다. 처음엔 파도의 장엄한 광경에 놀랐고 그다음으로는 무섭기도 아름답기도 한 그 소리에 매혹됐다. 그래서 꼭 한 번은 뉴질랜드의 파도를 보러 가고 싶었다.
파도가 거세기로 유명한 서쪽 해안가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단연 ‘피하(Piha)’다. 피하는 이름에서부터 파도를 연상시키는데, 마오리어로 배(카누)의 앞부분이 물을 가르며 일으키는 물결, 파동을 의미한다. 피하 비치에는 사자가 앉아있는 모습 같다고 해서 라이온 락(Lion Rock)이라고 불리는 바위 산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보면 꼭 뱃머리가 지나갈 때 물결이 갈라지며 퍼져가듯이 파도가 주변으로 일렁인다. 피하는 그 바위 산(라이온 락)의 오래된 이름이자(마오리어 정관사 테(Te)를 붙여 테 피하(Te piha)라고 불렸다.) 파도와 바위가 만나 물결을 일으키는 모습에서 따온 그 지역 전체의 이름이 되었다. 피하를 우리 가족의 첫 캠핑 장소로 정하고, 라이온 락까지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캠핑장을 예약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새해 첫 일정은 캠핑이 되었다.
짐을 싸는 것부터 만만치 않았다. 텐트처럼 무겁고 확실한 부피를 차지하는 걸 제쳐두고도 음식을 조리하기 위한 버너, 식기구, 식재료들을 몇 개 챙기기만 했는데 벌써 차 트렁크가 꽉 찼다. 에어 매트리스, 침낭, 테이블, 의자, 수건까지 최소한으로 필요한 걸 챙긴다고 챙겼으나, 로이는 자신의 옆 자리와 발 밑까지 짐이 꽉 찬 걸 보고 “여기 뭐가 있네?!” 하며 웃었다. 짐을 챙긴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날씨가 좋든 안 좋든 가야겠다는 의지가 타올랐다. 비 예보와 달리 다행히 날씨는 화창했고, 캠핑장에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며 자리를 선택하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먼저 해가 뜨는 쪽을 찾고, 나무 그림자가 생기는 것을 고려해서 텐트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화장실과 캠핑장 부엌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정했다. 일체형으로 설치가 쉬운 텐트를 구매했음에도 방수천을 깔고, 텐트를 조립하고, 흔들리지 않게 땅에 못을 박는 데까지 1시간은 족히 걸렸다. 짐을 대강 풀고 가장 먼저 한 것은 바다를 찾아 무작정 걸어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걸어가는 쪽을 눈치껏 살피며 7분 정도 걸으니 서핑 장소로 유명한 피하 비치가 펼쳐졌다.
파도는 생각보다 더 거셌고 시끄러웠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부서지는 파도 앞을 떠나지 않았다. 파도를 거스르며 헤엄쳐 나아가는 시간은 오래고, 보드 위에 겨우 올라타 파도를 타는 시간은 찰나인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바다로 뛰어들어갔다. 이곳에서는 시간조차 파도를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숙소는 물론 가게에서도 몇 시에 파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적힌 조간대 시간표가 붙어있었다. 우리 역시 2박 3일 동안 파도의 흐름을 따라 열심히 바다로 나갔다. 썰물 때에 가면 물로 가득 차 있던 암석 터널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사이를 걸어가 볼 수도 있었다. 또 밀물 때에는 낚시를 하거나 서핑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더 블루 풀(The blue pool)’이라는 곳은 해안 암석들을 넘어온 파도들이 만든 자연 수영장인데, 썰물 시간에 가면 거센 파도는 암석이 막아주고 이미 넘어온 물들이 무릎에서부터 허리 높이까지의 수영장을 이루고 있어 아이들과 같이 놀기 좋았다.
파도가 더 크게 느껴지던 건 오히려 밤이었다. 파도 소리는 철썩철썩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 같은 것이라고 느꼈는데 밤이 되자 쩌렁쩌렁 번개 소리처럼 들렸다. 로이에게 괜찮다고 다독이며 잠을 청했지만 나 역시 그 위압감에 압도당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론 마음이 답답한 이들이 왜 바다를 찾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에이다에게 피아노가 목소리였듯 누군가의 마음의 소리를 파도가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격한 파도 소리는 슬픈 이들의 포효하는 울음소리와 닮았다. 그래서 바다에 가면 되레 위로를 받게 되는지도 모른다. 나보다 더 크게 울어주는 이가 있구나 하고. 연말연초가 되면 지난해를 돌아보고 새해 결심을 하곤 하는데, 올해는 왠지 하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 보고 싶지 않았다. 2025년 크리스마스 즈음이 귤이의 예정일이었는데, 예쁜 아기를 지켜주지 못한 마음에 실패, 상실이라는 감각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어떠한 결심보다 가만히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때때로 파도가 내 어두운 시간들을 가져가기를 바라며.
파도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파도가 마음껏 내리칠 수 있는 건 돌아갈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위로 옆으로 사방으로 울컥울컥 튀어올라도, 흩어지고 부서지고 떠밀려와도, 이내 다시 바다의 품으로 돌아가는 파도. 가족이 있다는 건 그런 것이다. 마음껏 떠날 수 있고 안심하고 방황할 수 있는 것. 난 조금만 흔들려도 불안하게 표류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자리는 컸고, 남은 가족들은 저마다의 슬픔을 삼키며 시퍼렇게 멍이 든 가슴을 부여잡으며 살았다. 모두가 버거웠기에 우리는 같이 있었지만 각자도생 하는 삶이었다. 그래서 더욱 바다 같은 존재를 꿈꿨다. 어디로든 가볼 수 있게, 어떤 생각이든 펼쳐 나갈 수 있게 항상 그 자리에 있어주는 가족이 되어주고 싶었다. 돌아갈 수 있는 집, 안길 수 있는 품이 되어주고 싶었고, 그렇게 힘이 되는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아이에 관심이 없던 내가 로이를 낳고 둘째까지 생각했던 것도 어쩌면 나를 안아주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어두운 텐트 안에서 파도 소리는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고, 널브러진 생각들을 다 가져갔다. 모래 위에 있던 수많은 발자국들이 다음 날이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이,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남아야 할 것만 남았다.
푹 잠을 잔 듯 까치집 머리를 하고 일어난 로이는 "엄마, 나랑 놀자. 플리즈~"라고 말했다. 아이에게 팔을 벌리자 어김없이 달려와 안겼고, 여태 아이가 나를 안아주고 있었구나 깨달았다. 우리는 캠핑을 하는 내내 래시가드, 수영복 차림이었고 늘 물가에서 놀았다. 야외 활동을 많이 하니 배가 고파 무엇이든 잘 먹었고, 자연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넘어 자연 속에 푹 안기어 살았다. 그리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잠자리의 불편함보다 그 결핍에서 오는 단순함과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돌아보는 감각이 새해 결심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캠핑장 화장실에는 한국 공중화장실처럼 닫힌 문 쪽에 좋은 문장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파도는 나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는다.(The waves of the sea help me get back to me. - Jill Davis)라는 문구가 와닿았다. 우리는 다시 단순한 리듬 속으로, 삶의 루틴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다만 파도가 가져간 시간만큼 우리는 더 느리게 하루를 곱씹으며 살아갈 것이다. 작은 아이가 조그마한 조개를 더 잘 찾듯이 낮은 마음으로 작은 것들에 감격하며 한 발작씩 나아갈 것이다.
글/사진 장혜영, 그림 guka(https://www.instagram.com/madeinguka/)
위 에세이는 매달 마지막주 월요일 아침에 배달되는 뉴스레터 <다정한 시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정한 시선>은 7년 차 뉴질랜드살이 중인 작가가 겪은 시선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열심히 일만 할 줄 알았지 삶을 잘 살아낼 줄은 몰랐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살아가려 애쓰며 기록하는 에세이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무료 구독 신청을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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