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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영 Feb 20. 2024

엄마라는 세계

뉴질랜드 출산기

일러스트 guka


4살이 된 모세가 노란 들꽃을 꺾어 나에게 건네며 “선물이에요. 화병에 꽂아야 해요. 물도 줘야 해요.”라고 말하는 걸 보며 빙긋 웃음이 났다. 모세 엄마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이는 항상 부모를 바라보고 있고 외모는 물론 습관까지 닮아간다. 어느덧 2살이 된 로이는 음식을 먹고 휴지로 입을 닦는 일상의 아주 작은 동작들부터 ‘아구구, 어머나’ 하며 놀라는 감탄사까지 메아리처럼 따라 한다. ‘대체 언제 들은 거지? 어디서 본 거지?’ 깜짝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림을 그리다 크레파스가 책상에 묻자 물티슈를 꺼내 닦고 곧장 쓰레기통으로 들고 가 버리는 로이를 보며 내가 너무 깔끔을 떨었나 돌아보게 된다. 또 밥을 먹으며 “엄마, 엄마”하고 부르고는 음식을 집어 내 입에 넣어주고 또 “아빠, 아빠”하고 부르고는 이번엔 아빠 차례라며 음식을 건네주는 로이를 보며 우리가 저랬었나 웃게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상의 순간은 로이가 낮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인데, 비몽사몽 상태로 눈을 비비며 나를 발견하고는 세상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격하며 기뻐하는 로이를 보며 ‘엄마’라는 존재가 아이에게는 세상의 전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친정도 시댁도 없는 뉴질랜드에서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하다니, 친구들은 용기가 대단하다고 말했다. 실은 몰라도 너무 몰랐다. 아기가 생기는 것은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것이지만 아기를 키우는 건 노력하면 되는 건 줄 알았다. 기저귀 가는 법부터 목욕시키는 법까지 유튜브를 열심히 찾아보고 아기 인형을 들고서 예행연습을 했다. 실전에서는 아기는 인형과 달리 계속 움직이고 크게 울기까지 해서 백지상태가 되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임신 기간이 너무 힘들어서 빨리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는 것이 낫겠다는 철없는 생각을 했다. 양수가 터진 지도 모르고 ‘내 몸이 왜 이러지, 이게 뭐지.’하며 아기가 태어나는 날까지 어리숙한 상태로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됐다. 의료진이 시키는 대로 호흡을 내쉬며 진통을 겪다가 아기의 심장 박동이 낮아져서 응급 수술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서 다시 한번 말해달라는 내게 시간이 없다며 부리나케 수술실로 향하던 발걸음, 마취약 때문에 구토를 하고 혼미한 상태에서 괜찮을 거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손길, 그렇게 출산의 과정은 내 손을 떠나 정신없이 흘러갔다. 로이가 세상 밖으로 나와 울음을 터트리고, 남편이 탯줄을 자르고, 의료진이 내 품에 아기를 눕혀 젖을 찾게 하는 순간부터 세상은 정지한 듯이 고요하게 느껴졌고 왜 인지 모를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로이는 나를 엄마로 태어나게 했다.


나와 로이를 위해 베이비 샤워를 열어주고 케이크를 만들어준 줄리
로이도 나도 점점 익숙해져 가는 목욕 시간


뉴질랜드는 출산 직후부터 모자동실로 산모와 아기가 24시간 함께 있는다. 아직 말도 못 하는 갓난아기가 어찌나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지. 아기가 내는 소리에 모두 의미가 있지는 않다며 간호사는 내게 잠을 좀 자라고 애처롭게 바라봤다. 울음소리도 유독 커서 남편이 병실을 쉽게 찾아올 정도였고, 하루가 지나 다인실에서 1인실 배정을 받았을 때 로이가 너무 시끄러워서 그런 건 아니냐며 남편은 웃으며 말했다. 어린 시절 내가 발표를 하면 짝꿍이 귀를 막을 정도로 목소리가 우렁찬 아이였기에, 로이가 너무 크게 울어도 할 말은 없었다. 보통은 하루, 나처럼 제왕절개 수술을 한 산모도 2일 뒤면 병원에서 퇴원을 한다. 이후에는 수유하는 법을 알려주는 센터(birthcare centre)로 자리를 옮겨 2-3일을 보내는데, 한국의 조리원처럼 산모를 돌보기보다는 현실 육아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실전 능력을 키워주는 곳이다. ‘아기가 왜 안 잘까? 배고픈 걸까? 배가 아픈 걸까?’ 남편과 나는 아기를 알아가느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당시 적은 일기를 보면 눈물 투성이다. 아침에는 부모님 생각이 나서 울고, 오후에는 로이가 눈을 뜨면 어떻게 대처할까 두려워서 울고, 저녁에는 로이에게 분유를 먹이다 분수토를 하게 만든 것이 미안해서 울었다. 분명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잘 못하는 거 같아서, 준비가 너무 안된 거 같아서 자책하던 나날이었다. 그런 내게 줄리는 ‘너 자신에게 친절했으면 좋겠어(Be kind to yourself)’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초보 엄마 아빠로서 또 아기도 자라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으니까, 너그럽게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몫이었다. 육아에 정답은 없지만, 친절하게 서로를 대하는 것을 모토로 삼았다. 아기가 행여나 다치더라도 왜 조심성이 없었냐고 상대방을 탓하지 않고 나 역시도 너무 몰아세우지 말자고.


쓰레기통을 뒤지기 좋아하던 로이. 내가 미처 청소하지 못한 틈새를 어찌나 잘 찾아내던지.
로이를 위해 운전을 시작하고 매일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어떤 재밌는 하루를 보낼까.


로이는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었다. ‘내가 뭘 줄줄 알고 이렇게 입을 크게 벌릴까, 내가 어디로 데려갈 줄 알고 카시트에 가만히 앉아 있을까’ 나만 바라보는 아이의 무방비 상태에 더 큰 책임감을 느꼈다. 나를 이렇게 믿어주는 존재가 있다니 눈물 나게 고마웠다. 그렇게 낯설기만 했던 뉴질랜드에서 잘 살아내보고 싶다는 용기가 생겼다. 겁이 나서 3년 동안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운전을 시작했고, 로이와 어떤 재밌는 시간을 보낼까 궁리하며 매일 밖으로 나갔다. 이전에는 바라보기만 했던 바닷물 속으로 로이를 안고 들어가고, 이전에는 그리 관심 없었던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하며, 로이로 인해 나는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됐다. “로이는 엄마의 보물이야. 로이처럼 소중한 건 없어.” 잠들기 전 속삭이며 말하면 로이는 정말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 인지 알까 싶지만 감동을 받은 듯한 얼굴로 내 품에 파고 들어서, 오히려 감격하는 쪽은 나였다. 로이는 반짝거리는 표정으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로, 달려오며 안기는 따뜻한 포옹으로, 때론 기습 뽀뽀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끊임없이 알려준다. 아이 못지않게 엄마도 아이를 보며 배워간다. 솔직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사람을 신뢰하고 응원하는 법을, 오늘 하루를 기대하며 맞이하는 법을.  


아이와 함께 새로운 곳을 방문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엄마 역시 자라난다.


글/사진 장혜영, 그림 guka(https://www.instagram.com/madeingu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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