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혜영 Apr 23. 2024

뉴질랜드에서 은퇴 걱정이 없는 직업은?

‘개척자’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뉴질랜드 파머(Farmer)의 삶

일러스트 guka


송아지를 키우는 건 아기를 돌보는 일과 비슷하다. 태어난 후 8주까지는 우유를 먹는데, 그래선지 송아지에게도 빨기 본능이 있다. 입 가까이에 손을 가져가면 혀를 내밀고 쪽쪽 빨아서 농장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너도나도 자신의 손을 갖다 댄다. 아기가 젖을 떼고 점점 이유식 양을 늘려서 삼시세끼 밥을 먹게 되듯이, 송아지도 우유와 함께 곡물 사료를 주고 서서히 우유의 양을 줄여서 사료만 먹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다음 8주 동안 곡물의 양을 줄이고 점점 풀을 뜯어먹는 연습을 시켜서 16주 차가 되면 사료 통을 완전히 치운다. 우리가 흔히 뉴질랜드 하면 떠올리는 초원을 누비며 자유롭게 풀을 뜯어먹는 방목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뉴질랜드에서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양 옆으로 목장이 펼쳐져 있어 소와 양, 말 등을 보는 것이 흔한 차 창 밖 풍경이다. 공원이 목장 안에 있거나 목장을 바로 접하고 있어서 산책을 하며 양과 소를 구경하는 것도 쉽다. 보기에는 가축들이 자연 속에서 저절로 자라나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어떨까?


헌틀리에서 37년째 소(Bull) 목장을 운영하고 있는 로저(Roger)에게 물어봤다. 소들이 본능적으로 자신이 먹어도 되는 풀과 먹으면 안 되는 풀을 알고 있느냐고. 결론은 아니었다. 소들은 풀만 먹을 수 있고 블랙베리와 같은 열매는 먹어선 안 된다. 특히나 블랙베리는 번식력이 빠르고 덩굴에 가시가 있어 소에게 좋지 않다. 그래서 수시로 잡초를 제거하고 토질 검사를 해서 땅을 비옥하게 관리했다. 땅이 오물 때문에 더러워지면 벌레가 많이 생겨서 더러운 곳을 파냈고, 필요에 따라 비료를 주면서 땅의 발란스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풀은 감자칩과 비슷해. 우리도 바삭바삭한 감자칩은 맛있지만 눅눅한 감자칩은 먹고 싶지 않잖아. 그처럼 풀도 맛있는 풀이 있고 너무 눅눅하거나 푸석해서 소들이 먹고 싶어 하지 않는 풀이 있어.” 막 구운 감자칩처럼 신선하고 윤기 있는 풀을 소들도 먹고 싶어 한다니. 파머(Farmer, 낙농업자)는 가축만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건강한 풀들이 자라날 수 있도록 땅을 일구는 농부도 되어야 했다. 또 어떤 날은 시내가 없는 곳에서도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펌프를 설치하고 파이프를 연결해 곳곳에 소를 위한 식수대를 만드는 배관공이 되기도 했다. 


목장에서 풀을 뜯어먹으며 방목으로 자라고 있는 소들. 귀가 위로 올라가 있어 건강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송아지가 자신의 손을 빠는 것을 재밌어하는 애샤. 우유를 먹어야 하는 송아지는 아기처럼 빨기 본능이 있다.
송아지가 새로 들어온 날. 봄철이 되면 송아지를 사 와서 우유와 곡물을 주며 키우기 시작해 8주 차가 되면 풀을 뜯어먹는 연습을 시킨다.
송아지들에게 먹일 우유를 짜기 위해 이동하고 있는 젖소들. 오토바이를 타고 뒤를 쫓으면 자연스레 소들이 이동한다.


로저에게 소가 아프면 수의사를 부르느냐고 물었다. 그는 흔한 질병이면 자신이 직접 항생제를 주사해서 치료한다고 말했다. 수의사를 시골 지역에까지 부르는 건 비용이 많이 들고 힘들기 때문에, 소들을 잘 관찰해서 아픈 이유를 알아내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주의 깊게 관찰하면 다 알 수 있어. 소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가 위쪽으로 올라가 있으면 행복한 상태야. 보통 배가 아픈 경우 귀를 아래로 내리고 있어. 소들도 사람과 비슷해. 우리가 슬플 때 고개를 숙이게 되듯이 소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면 아프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는 양 목장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파머라면 스스로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할 수 있어야 하며, 필요한 것이 없으면 직접 만들어서 돌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낙농업에 대한 수업을 듣고, 17살 때부터 다른 농장에서 일꾼으로 일하며 경험을 쌓았다. 유튜브도 없던 시절, 모르는 것이 생기면 이웃 농장에 찾아가 물어보고, 전문 배관공, 전문 건축가를 찾아가 물어보며 기술을 익혔다. 그에게 파머란 직업이자 삶의 방식이었다. 송아지들에게 먹일 우유를 일일이 들고 나르는 게 힘들어, 큰 우유통에서부터 각 막사로 이어지는 파이프를 연결해 우유를 나르는 반자동 시스템을 개발해 내기도 했다. 자신이 세운 임무를 완수했을 때 행복을 느낀다는 그를 보며 파머는 '개척자'라는 말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파머의 장점은 은퇴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로저의 주변에는 76살, 93살 등 노령의 나이에도 정정하게 일하고 있는 이들이 많고, 그 역시 몸이 허락하는 한 오랫동안 일하고 싶다고 했다. 사무직의 경우 나이가 들수록 빠르게 변하는 기술과 트렌드 때문에 도태되기도 하지만, 파머라는 직업은 연륜을 가치 있게 여긴다. 나이가 들수록 생활의 지혜가 더해지고 그동안 쌓인 경험 때문에 문제를 빨리 파악하게 된다. 노익장이 활약할 수 있는 분야라는 점도 좋지만, 내가 느끼는 파머라는 직업의 멋진 점은 손을 사용해 직접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핸디맨(Handyman)이어선지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로저는 아내 아니타(Anita)의 생일에 한 손에 붓을 들고 있는 작은 곰 인형을 선물했다. 당시 아니타는 빈 집으로 방치돼 있던 목장 안의 작은 집(cottage)을 페인트칠하며 수리하고 있었는데, 붓을 든 인형을 보며 당시를 회상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와, 붓을 든 인형을 다 파네."라고 말하자, 로저는 "아니, 내가 만든 거야."라고 무심하게 말했다. 남편이 투박한 큰 손으로 작은 곰을 붙잡으며 인형의 손에 붓을 달고 바느질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귀여웠다고. 이렇게 손수 선물을 만드는 낭만은 번화한 도시에서 떨어져 자신의 곁을 지켜주는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가치를 알아야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목장을 보며 인생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인터뷰에 응해준 로저와 아니타.
목장 지도를 보여주며 설명해 주는 로저. 목장에 울타리를 설치해 소들을 옮겨 다니며(로테이션) 키우는데, 그래야 풀들이 새로 자라날 시간이 생긴다.
로저 목장의 일부. 파이프를 연결해 우유통에서 송아지의 막사까지 우유를 나르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파머는 필요한 것이 생기면 직접 만들고 발명하는 핸디맨이다. (사진제공 로저)
아니타를 닮은 곰 인형을 만들어 선물한 로저.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남아있는 것이 파머의 매력인 듯하다.

 



<다정한 시선>은 매주 월요일 아침 배달되는 뉴스레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정한 시선>은 6년 차 뉴질랜드 시골 살이 중인 작가가 겪은 시선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열심히 일만 할 줄 알았지 삶을 잘 살아낼 줄은 몰랐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살아가려 애쓰며 기록하는 에세이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지난 화 보기가 가능합니다.

https://newzealand.stibee.com/


이전 15화 버스를 타며 느낀 한국과 뉴질랜드의 차이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