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국물 속엔, 내 짝사랑이 아직 끓고 있습니다. 숭덕 분식”
떡볶이 국물처럼 달고 매웠던
나의 짝사랑
떡볶이 국물처럼 달고 매웠던
나의 짝사랑
중학교 2학년 봄이었습니다.
그때의 난 머리는 까까머리였지만 마음은 자꾸만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주일마다 서촌 언덕 끝의 작은 교회에 가는 이유,
절반은 예배 때문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짝사랑 그녀 때문이었습니다.
성가대 앞줄에서 찬송가를 부르던 그 친구...
좋아한단 말도 내색도 못하면서 동갑나기 친구라는 이유로
서로 편하게 말하는 사이....
맘은 편치않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그날도 예배를 마치고 교회 앞 골목으로 나서는데
그녀가 가방을 매며 물었습니다.
“너 집에 가니?”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습니다.
“응..내가 데려다줄까?”
그녀는 놀란 듯 나를 보더니
“진짜? 멀어도 괜찮아?” 하며 웃었습니다.
그 미소에 세상이 조용히 멈춘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함께 버스 정류장으로 걸었습니다.
버스가 서촌을 벗어나 평창동으로...북악터널로 들어설 때,
어둡고 긴 터널 속 조명이 번갈아 얼굴을 스쳤습니다.
그 빛 사이로 그녀의 옆모습이 보일 때마다
고운 그녀의 목선에 내 심장은 터질 듯 뛰었습니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봄빛이 다시 버스 안으로 흘러들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 정릉의 골목길은 조용했고,
멀리 대일 고등학교 너머로 보이는붉은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그녀의 말에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습니다.
“괜찮아.”
그녀가 걸음을 멈추며 물었습니다.
“배 안 고파?”
“음... 조금?”
“그럼 나랑 떡볶이 먹자.”
그녀가 이끌어간 곳은 학교 뒤편의 오래된 골목 안,
유리창이 김으로 가득한 작은 분식집이었습니다.
‘숭덕분식.’
즉석 떡볶이 2인분을 그 친구가 주문하고 잠시후,
사장님이 검은 후라이팬에 떡과 오뎅 양배추,파,당면 가운데 검붉은 고추장이
올려져있는 평생 처음 보는 떡볶이를 까스위에 올려 놓으시고...
국물은 달고 매웠으며,
김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봄바람보다 따뜻했습니다.
“여기 진짜 맛있어.”
그녀가 젓가락으로 어묵 한 조각을 건네며 웃었습니다.
나는 말없이 받아 한입 베어물었습니다.
입안은 얼얼했지만, 처음 맛보는 환상적인 맛,,...
그날 이후,
나는 매주 일요일이면 예배보다 정릉가는 그녀와의 동행을 기다렸습니다.
‘혹시 오늘도 데려다줄래?’
그 후로도 그녀를 바래다 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우리는 어김없이 숭덕분식에 들렀습니다.
40여년 세월이 흘러 다시 찾은 정릉의 숭덕분식은
그때보다 50미터쯤 자리를 옮겨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찾은 이곳엔
예전과 달라진 간판이 달려 있었지만,
검은 후라이팬의 붉은 국물은 여전히 매콤하고 달달했습니다.
낮익은 사장님의 얼굴..
그때 그 사장님의 딸이 이제는 어머니의 앞치마를 이어받아
주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전엔 사장님의 옆에서 앞치마 끈을 잡고 장난을 치던 꼬마였는데,
이제는 중년이 되어 그때 그 손맛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정성과 어머니의 손맛을 합쳐
자신의 색으로 완성한 50년 전통의 떡볶이,
숭덕분식의 떡볶이는 여전히 달큰하고 국물이 많았습니다.
요즘 분식집의 자극적인 매운맛이 아니라,
국민학교—아니, 초등학교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부드럽고 달달하고 순한 매운맛이었습니다.
50년 전 아이들의 입맛과 지금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맛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변하지 않은 건 제 입맛이었습니다.
그때도 지금도 저는 초등학생 입맛이니까요.
지금도 이곳은 1인분씩 떡볶이를 시켜 먹을 수 있습니다.
라면사리를 추가하면 7천 원,
어릴때 추억을 소환하기엔 떡볶이만한 메뉴가 없는것 같습니다.
1977년, 숭덕국민학교 후문에서 시작한 숭덕분식.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날의 검붉은 국물은 여전히 끓고 있습니다.
그 친구도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겠지요?
달고 매운 후라이팬 속에서,
세월과 추억이 함께 익어가고 있습니다.
한 숟가락의 떡볶이 속에서, 나는 여전히 그때 14살의 소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