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산신령 고양이, Homer>
폭풍의 여파로 3인용 텐트를 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지 않아, 다시 하루를 통나무집에서 묵게 되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오르막길로 5분을 걸어가야만 해서 여러모로 불편하긴 했지만 사실 9시부터 5시까지의 고된 노동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보다는 메인 오두막이나 호숫가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정말 잠을 잘 때만 잠시 머무는 곳이다 보니 이 집의 장점에게서도 단점에게서도 무뎌져 적응해 갈 때 즈음, 도저히 적응이 안 되는 문제가 생겼다. 바로 ‘화장실’.
통나무 집에서 20걸음 정도 떨어져 있는 화장실을 가는 것이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 숲이 우거진 곳이라 볼일을 보다가도 야생동물이 튀어나 올 것만 같아 불안했다. 실제로 몇 년 전 곰이 내려왔었다고 하니, 화장실을 갈 때면 바짝 긴장이 되었다. 무방비상태로 있다가 곰이 내려와 화장실을 흔들면 어쩌지. 문을 열었는데 커다란 무스 한 마리랑 눈이 마주치면 어쩌지.
“우리 저녁에 물을 많이 마시지 말자.”
겨우 내놓은 해결책이었다. 어쩔 수 없다. 한밤 중에 화장실을 가지 않으려면 마시는 걸 줄이는 수밖에. 하지만 한여름, 길가에 쓰러진 나무를 6시간 넘게 옮기는 것이 봉사활동의 주된 업무이다 보니, 노동 중에는 땀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고 그렇게 난 오전의 굳은 다짐을 잊은 채, 하루 종일 물을 마셔댔다. 아니나 다를까 한 밤중에 화장실이 간절하다. 눈을 떠보니 새벽 2시, 곤히 잠든 청빈이 와 혜리를 깨울 순 없었다. 참아볼까 했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핸드폰 후레시 라이트를 켜고 집을 나섰다. '뭔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튀는 거다.'라는 다짐과 함께.
‘냐옹’
산 고양이 이은 지 집고양이인지 모를 Homer다. 호머는 치즈색 고양이로 날렵하고 말랐지만 귀여운 외모로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이 센터의 시그니처다. 혜리가 첫 날 봤다고 했던 고양이는 아마 이 호머였을 것이다. 주로 이 센터 마을에 서식하지만, 보이지 않을 때는 산에 있다고 한다. 산에 다니는 걸 보니 분명히 집 고양이는 아니지만, 오두막에 들어와 잘 때도 있다고 하니 호머 입장에서는 우리가 불청객일 텐데, 착하게도 들여보내라고 보채지 않고 문밖에 얌전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문을 여니, 기지개를 켜고 나를 보고 있다. 호머를 보니 어쩐지 마음이 좀 안심이 된다.
“저기 있잖아 호머, 나랑 화장실 같이 가주면 안 될까? 너무 무서워. 제발 제발.”
알아들을 리 없을 걸 알지만, 내 발에 온몸을 비비는 호머를 쓰다듬으며 부탁했다.
“먀옹.”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데 호머가 따라온다. 아마 20걸음 떨어진 화장실 가는데도 벌벌 떠는 인간을 가엾게 여겼나 보다.
“나 볼일 보고 올 테니까, 가면 안돼. 나 나올 때까지 기다려줘.”
호머가 가버릴 까 봐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 몇 번이나 당부했다. 사실, 여기까지 따라온 건 그냥 우연이고 문을 다시 열면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호머가 가만히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사람 말을 알아듣게 분명하다.
“고마워! 나 기다려 준거야? 착해.”
쓰다듬는 손길을 몇 초 놔두더니, 곧장 집 쪽이 아닌 숲 쪽으로 폴짝 뛰어간다. 마치 이제 자기 할 일은 여기서 끝났다는 듯이. 몸집이 작아 귀엽기만 한 줄 알았는데, 산속으로 성큼 걸어가는 모습이 꽤나 의젓하다. 언뜻 보면 이 숲의 산신령 같기도. 혹시, 문 앞에 있었던 것도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서였을까.
<모기 샤워>
마땅한 샤워실이 없는 탓에 우리는 그냥 호수에서 씻기로 했다. 아무리 호수지만 땀에 절여진 몸을 씻는다는 생각을 하니, 상상만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야외다 보니 아예 다 벗고 순 없고, 얕은 물가에서 옷을 입고 입수해 대충 헹구는 식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호수에서 화학적 물질은 사용이 금지되어있었기 때문에 샴푸로 머리를 감을 때는 호수 밖에서 큰 양동이에 푼 물로 씻어야 했다. 다행히 사람이 세 명이니, 돌아가면서 양동이에 물을 길어 주기로 했다. 이렇게 매일 씻는 것이 ‘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세상 당연했던 일들이 소중해지면서 여기 있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머리를 그냥 묶고 며칠씩 씻지 못한 쉰내가 나도 그려려니 하게 된다. 나도 생리만 아니면 차라리 그럴 텐데.
첫 샤워라 이것저것 챙겨서 가려다 보니, 벌써 해가 어둑해져 주변이 벌써 깜깜하다. 일단 호수에 온몸을 적셔야겠다는 생각으로 물속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산 깊은 곳의 호수라, 맑고 깨끗할 것 만 같지만 막상 호수는 짙은 녹색이다. 여기서 씻어도 괜찮은 걸까 잠시 고민하다가 별 다른 선택권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쉰내 풀풀 풍기면서 잘래, 그냥 좀 참고 씻을래?’
“앗 차거!”
한 여름인데도 한기가 몰려온다. 사계절 내내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걸 좋아하지만, 찝찝함이 다 얼어붙는 느낌이라 그런지 추우면서도 상쾌하다. 고된 노동 끝 상쾌함, 시원한 호수, 좋은 경치를 보고 있자니 놀랍게도 이 상황이 꽤나 즐겁다.
아니, 즐거웠다. 호숫가로 나와 머리를 감기 위해 후레시를 켜기 전까지는. 후레시를 켜자 물가의 산모기들이 우리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입고 있던 레깅스를 뚫고 피를 빨아먹기 시작한다. 종아리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손으로 쳐내고, 발을 굴러봐도 잠시 뿐이었다. 우리 셋은 그렇게 제대로 머리를 감지도 못한 채 숙소에 돌아왔다. 모기에게 잘 물리는 체질이 아니던 내가 각 다리에 10방이 넘게 물렸다. 산모기라 그런지 가려움이 극심하기도 하고 종아리가 땡땡 부어버렸다. 셋 중 청빈이의 피가 가장 맛있었는지 종아리에 틈이 없을 정도로 물렸다. 혜리는 그런 청빈이의 다리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청빈 언니, 흉 안 져야 할 텐데..."
그날 밤은 발가락으로 종아리를 긁다가 손으로 긁다가 종아리를 서로 비벼 긁다가 그렇게 날이 새어버렸다. 호된 교훈이다. 물가에서는 빛을 만들면 안 된다는. 그 이후로는 저녁을 굶는 한이 있더라고 꼭 해가 있을 때 씻으러 간다. 후다닥 달려가야 한다. 해가 지면 모기 샤워를 하게 될 테니. 이렇게 미국 시골에 점점 적응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