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earmycanada Oct 23. 2020

(필리핀) 상상이 현실이 된다면

별로네

  


 해발고도가 제주도 한라산 정상과 비슷하다는 이 곳, 바기오는 필리핀 마닐라공항에서도 꼬박 7시간을 버스로 달려야만 하는 첩첩산중이다. 심지어 길을 꼬불꼬불하고 험난해 오고 가는 길목엔 사고도 많다. 그럼에도 많은 현지인과 유학생이 바기오로 몰려드는 이유가 있다. 바로 바기오가 가진 특별한 매력 때문. 산속에 도시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방이 산으로 덮여 평지를 보기 힘든 이곳은 아슬아슬하게 벼랑에 지은 집들과 선선한 날씨로 유명하다. 필리핀이라고 하면 어디든 덥고 습할 것만 같지만, 바기오는 아침에 두꺼운 후드티셔츠를 입어야 할 정도로 선선하다. 마닐라에 사는 필리핀의 대통령의 여름휴가용 별장이 바기오에 지어진 것을 보면 말 다했다. 



 시원한 날씨도 좋지만 뭐니 뭐니 해도 바기오의 매력은 안개다. 3층 내 방 창문으로는 다크 그린색으로 온통 물든 산이 보인다. 방에 들어온 첫날, 나는 홀린 듯이 이 풍경에 취해 침대 위치를 창문 옆으로 그만 옮겨버리고 말았다.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드는 순간까지 창밖을 보고 싶었다. 하늘과 맞닿을 정도로 높은 산 중턱에는 안개가, 산 위로는 구름이 있다. 이 안개는 그 때문에 유치하지만 귀여운 상상을 하게 된다. 혹시 내가 지금 구름나라에 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래서 저녁에 하는 산책보다는 아침에 하는 산책을 더 즐기게 되었다. 아침을 먹고 소화를 핑계 삼아 동네를 한 바퀴 쭉 돌 때면 일부러 높이 경사진 곳만을 찾아 꾸역꾸역 올라가고야 만다. 더 높은 곳에 닿으면 정말 구름을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수업이 없는 주말이면 그 상상은 현실이 되어버린다. 발코니로 의자를 끌고 나가 작정하고 구름나라에 사는 호사를 누려보기로 한다.  읽을 책, 노래를 틀어주는 노트북, 그리고 달콤한 커피 코 브라운 믹스커피와 함께. 이맘때 즈음부터 주말 아침이면 마룬 5의 Sunday morning을 듣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구름과 꼭 어울리는 선율과 가사에 귀를 맡기고 눈은 백화점에서 고르고 고른 어여쁜 동화책 속 이야기를 따라간다. 그러다 햇빛의 농도가 짙어지기 바로 전에는 책을 덮고 맘껏 맞은편의 산을 눈에 담아본다. Sunday Morning을 흥얼거리며. 


Sunday morning rain is falling

비가 오고 있는 일요일 아침

Steal some covers share some skin

이불속에서 살을 맞대죠

Clouds are shrouding us in moments unforgettable

잊을 수 없는 이 순간을 구름이 뒤덮네요






 바기오의 안개가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는 곳을 꼽으라면 내 방 발코니 말고도, 보태니컬 가든을 꼽을 수 있겠다. 보태니컬 가든은 중국식으로 꾸며진 큰 정원으로 바기오에서 몇 안 되는 관광명소이다. 얼굴이 크고 화려한 꽃이 곳곳에, 그리고 새빨간 중국식 정자와 둥글게 꺾인 곡선의 다리들도 있다. 비가 오는 날엔 길이 미끄러워 가기 힘들지만, 적당히 안개가 낀 축축하고 흐린 날에는 마치 신선이 나올 것 같은 풍경을 선사해준다. 


 이 곳엔 주로 세실과 함께 갔다. 바기오에서만 17년을 산 세실은 이 도시에서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 바로 보태니컬 가든이라고 했다. 온갖 지프니(바기오의 버스)와 차에서 나오는 매연으로 공기가 퀴퀴한 바기오에서 유일하게 코딱지 걱정 없이 공기를 맘껏 들이마실 수 있는 곳 이란다. 우리는 자욱한 안개를 발끝으로 휘저으며 걷다가 앉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다 분위기에 취해 세실에게 숨겨왔던 상상을 고백해버렸다. 


"있잖아, 나 사실 가끔 안개가 구름이라는 상상을 해. 뭔가 중국 무협소설에 나오는 공주가 된 기분이야!"


"안딩!(Andrea의 필리핀식 이름), 이거 구름 맞아! 하하하"


"Talaga??!!" 

진짜?!(타갈로그)



이럴 수가. 난 3개월 동안 안개가 구름이라는 상상 속에 살았던 것이 아니라, 구름이 안개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다. 정체를 알고 나니 왠지 배신감이 든다. 더 이상 상상을 할 수가 없다. 진짜 구름 속에서 나는 여전히 나니까. 역시 인간은 착각 속에 살 때가 가장 행복한 모양이다. 

이전 01화 프롤로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