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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이 가능한 매주 주말이면 여기저기 피곤한 여행을 가자는 클래스메이트들을 피해 세실의 집으로 향한다. 이렇게 매주 가는 것이 민폐 같아 죄책감을 덜기 위해 한인마트에 들렀다. 세실이 좋아하는 신라면, 딸 크리사가 좋아하는 고추 참지 캔, 그리고 아들 루이스가 좋아하는 초콜릿 과자도 샀다. 다행히도 세실 가족과 입맛이 비슷하다. - 내가 그린 망고를 식초에 찍어먹는 시큼함을 싫어한다는 것을 빼고는 - 특히 매운맛에 있어서는 더 그렇다. 외국인이라 한국의 라면을 매워할 줄 알았는데, 필리피노 사이에서 한국 라면은 인기 만점이라고. 짜고 매운 국물이 입에 딱 맞는단다. 크리사와 세실은 신라면에 고추참치를 통째로 넣어서 먹을 정도로 매운맛을 좋아한다. 루이스는 짠 것보다는 단 맛을 좋아해 여러 가지 달콤한 한국 과자를 시도해 보는 것을 좋아한다. 루이스가 좋아할 만한 신기한 과자가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붕어빵처럼 생긴 과자를 하나 골랐다. 도란도란 모여서 같이 먹을 걸 생각하니 신이 난다.
세명이 사는 집이지만 방이 없어 세실은 소파에서 잠을 자고 크리사는 구석에 있는 침대에서 루이스는 접을 수 있는 간이 매트리스를 밤마다 깔고 잔다. 이렇게 세 식구도 버거운 곳에 자꾸 간다는 것이 맘이 썩 편하지 않지만, 이런 내 마음과 다르게 크리사의 침대를 잠깐 빌려 낮잠을 잘 때면 3시간이고 4시간이고 꿀잠을 자버린다. 아마 불편한 건 머리고, 몸과 마음은 편한가 보다. 영화를 보면서 차나 과자를 먹는 것 말고는 딱히 하는 것이 없어 피곤하지도 않은데 마치 고향 내 집에 온 것처럼 잠이 쏟아진다. 나는 자칭 이 집 '첫째 딸'이라고 말하며 세실을 'nanay'(타칼로그어 엄마)라고 부르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이 집 맏딸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아직은 친구들과 노는 것이 더 좋은 둘째 딸 대신 같이 쇼핑을 가기도 하고 커피도 마시기도 하면서. 가끔은 어린 동생들에게는 말하기 힘든 엄마의 고민도 듣는다. 가장으로써의 무게라던지, 두 딸과 아들이 안정적인 직업을 갖게 되면 그만 세상을 하직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행복할 것 같다는 얘기 등. 그런 가슴이 저린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결국엔 신라면을 가끔 사들고 오거나 실없는 농담으로 세실을 웃게 해주는 것, 그리고 이렇게 모르는 단어를 물어가며 고민을 들어주는 것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도 세실은 그냥 그런 잔잔한 시간들을 저와 함께해주는 것에 늘 감사함을 표한다. 내가 일요일 저녁에 학원으로 돌아갈 때면 택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면서. 그런 잔잔한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우리는 어느새 친구이자 모녀가 되었다.
크리사와 루이스가 놀러 나가고 단 둘이 있는 시간이 오면 첫사랑이야기나 옛날 얘기를 들려달라고 조르곤 한다. 어느 날은 소파 밑 깊은 곳에서 낡은 앨범을 꺼내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흑백사진을 보여줬다. 흑백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빛나는 필리핀 할머니의 미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 할머니는 엄마처럼 곱슬머리가 아니네?"
"하하. 응 이 곱슬은 부계 쪽에서 온 유전이지! 엄마는 공주님 같이 우아한 머리였어."
'필리핀 조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동화가 따로 없다. 마닐라에서 꽤 부잣집 딸이었던 할머니는 가난한 노동자였던 할아버지를 만나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단다. 가녀린 몸에 공주님 같은 머릿결을 가진 할머니는 정말 상냥한 어머니였다고 한다. 당신을 닮아 잔병치례가 많았던 세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유난히 예뻐했다고. 어머니 이야기를 하며 사진을 쓰다듬는 세실의 손길에서 애틋함이 느껴진다.
"안딩, 다음엔 꼭 필리핀 할아버지 보러 마닐라 가자. 그때 막냇동생도 소개해줄게."
"Talaga? 나 정말 가도 돼?"
"그럼! 이렇게 예쁜 외손녀 있는 거 아시면 엄청 좋아하실 거야."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마지막 밤을 필리핀 '친정 집'에서 보냈다. 이별의 서투른 나는 어색한 자세와 미소로 택시 앞에 서있었다. 세실은 벌써 눈물을 글썽인다. 나를 안고 "안딩, 꼭 다시 와야 해"라고 몇 번을 속삭이면서. 그리고 택시에 탄 내 손에 졸리비의 피치망고 파이 두 개를 내 손에 쥐어준다. 갈 때 한 개, 공항에서 한 개 먹으라며. 간 밤에 치킨이 먹고 싶다며 굳이 졸리비까지 다녀온 것이 나에게 줄 피치망고 파이를 사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편이 무너져 내렸다. 필리핀에서만 판다는 피치와 망고가 들어간 달콤하고 바삭한 파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간식이었다. 시내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항상 두어 개 씩 사올 만큼 자주 먹었던 피치망고 파이를, 세실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정말 엄마의 말대로 택시에서 하나, 공항에서 하나를 꾸역꾸역 다 먹었다. 파이는 다 식어 차갑고 눅눅했고 밀려오는 울음과 함께 삼키느라 목이 막혔지만 그간 먹었던 건 비교도 안 될 만큼 달콤하고 맛있었다. 나는 결국 비행기에 올라타 어깨를 들썩이며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라면과 농담, 피치망고 파이일 뿐이라도 이렇게 사무치는 걸 보면 우리는 정말 가족이 되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