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세이건, <코스모스> 북리뷰
도대체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천둥벌거숭이 유년시절을 지난 이래, 우리는 가장 원초적이고도 근원적 물음인 이 빅 퀘스천에 대하여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답할 수 없는 말뭐(말해 뭐해)의 대상인 것이다. 생각해 보라. ‘지구 다음 행성은 화성이 나을까요, 타이탄이 나을까요’, ‘중력의 실체는 도대체 뭘까요’의 질문과 ‘검찰 개혁이 되긴 할까’, ‘코로나가 한창인데 여행가도 될까’류의 질문 중 어느 것이 더 현실적이고 생산적으로 다가오는가를.
철학에서조차도 더 이상 다루지 않는 근원적 빅 퀘스천들에 대해 묵묵히, 끈질기게 답을 추구해 오고 있는 것은 어쩌면 과학이 유일할지 모른다. 유구한 역사의 창조론으로부터 인간의 위상을 기어이 어류와 파충류의 대열에 편입시킨 진화론과, 태양이 도는가 지구가 도는가를 두고 오랜 시간 벌여온 천문학계의 설전, 우주대폭발 이래 끊임없이 팽창하는 우주와 별들의 진화에 매달리는 물리학의 집요함은 비단 오늘 나의 하루와 한 세대의 역사만을 겨냥한 것은 아닌 것이다. 너무나 장대하지만 어쩌면 무모해 보이기도 하는 과학의 역사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속에 유려하고도 숭고하게 녹아 있다.
과연 저자는 과학사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거듭 쓰기를 통해 이어온 과학의 유산을 몹시 애정하고 자랑스러워한다. 우주와 지구, 인류의 역사를 그저 우연이나 맹목이 아닌, 가장 조화롭고도 우아한 실제, 절묘한 상관관계로 인식하는 저자에게 그 기막힌 작동 원리를 발견하고 기술한 과학의 역사는 그 자체로서 최상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탄소와 유기분자를 거친 생명 진화의 신비, 점성술로부터 독립 선언한 천문학, 공중제비를 도는 화성 궤도의 실체, 우주 건달 혜성, 황산비의 행성 비너스(이름이 무색한), 연분홍빛 하늘의 화성(실제 감자 농사가 잘 될지 모르겠지만), 가스덩어리 거대 목성, 시공간의 얽힘, 웜홀의 존재, 태양과 지구의 미래... 생명의 근원에 대한 탐색과 우주에 대한 인류의 호기심, 그리고 이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대응의 과정은 결국 ‘우리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알지 못한다. 과학은 여전히 무지하다. 하지만 가설과 검증, 이론 정립을 수없이 거듭하는 동안 과학은 무명과 미신, 맹목적 종교로부터 벗어나 인간 자신의 이성에 의지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명하고자 한 유일한 활동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저자는 과학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오니아와 알렉산드리아, 네덜란드의 열린 환경에 주목한다. 개방적 사고와 생활양식,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험과 도전 정신은 과학의 발달을 촉진하는 요소로 간주된다. 또한 과학에서는 기존의 관념이나 이론보다 실측과 경험의 가치가 중시된다. 반면, 경직된 사고와 폐쇄성은 과학의 쇠퇴를 초래한다. 그리하여 고대 과학의 위대한 업적(탈레스, 엠페도클레스, 아낙시만드로스, 데모크리토스 등)이 맥을 잃고, 한때 위용을 자랑했으나 어이없게 스러져 버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수많은 장서들(파피루스 50만여 권)의 사연은 저자를 몹시도 상심케 한다.
저자에 따르면 코스모스의 실체에 접근하면 할수록 즉, 인류사의 위대한 발견과 대면할수록 인류의 지위는 점점 강등되었다. 우주의 중심에서 변방의 은하로, 수천억 개의 별들 속 태양의 주변머리를 도는 행성 중 하나, 그 속에 한 평 남짓한 땅뙈기에 선 먼지 같은 존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코스모스의 탐구에 직면해야 한다. 스스로의 위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만이 현실 상황의 개선에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곧 빅 퀘스천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인 것이다.
생물학, 천문ㆍ물리학, 화학 등의 과학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사회학과 인문학, 철학의 영역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저자의 장황하고도 방대한 4차원적 서술에 책을 읽는 동안 수차례 카오스와 기함의 위기를 넘겼으나, 이는 한치 앞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납작이’로서 감내해야 할 몫으로 여기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