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이 해부되는 시대

에릭 캔델, 「통찰의 시대」북리뷰

by 루이

통찰(洞察) [통:찰]

1. 명사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봄.

2. 명사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여 장면의 의미를 재조직화함으로써 갑작스럽게 문제를 해결함. 또는 그런 과정.

3. 심리 치료에서, 환자가 이전에는 인식하지 못하였던 자신의 심적 상태를 알게 되는 일.


‘도상학’이라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파르미지아니노의 ‘목이 긴 성모’를 연금술로 풀어낸 <헤르메스의 기둥>이라는 소설을 흥미진진하게 읽고 난 후였다. 매너리즘 화가였던 화가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과장된 포즈를 배경으로 알 수 없는 기둥과 성 제롬을 (뜬금없이) 그려 넣었고, 소설가는 하나이면서 열주로 묘사된 기둥에 주목하여 그림 이면에 담긴 화가의 이야기를 장황하고도 흥미롭게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미술학도 출신답게 회화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당대의 시대적 맥락, 화가의 실제 삶을 버무려 그럴싸한 서사와 함께 그림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제공한 것이다. 파르미지아니노의 그림이 실제로 연금술의 성공 여부를 암시한 것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다만 화가가 남겨놓은 그림은 모호하지만 매력적인 ‘텍스트’가 되어 수용자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다양한 사료들의 논리적 배열을 통해 그럴싸한 이미지로 재생산된 셈이다. 우리는 회화 작품을 감상할 때 그림의 표면적 이야기에만 주목하진 않는다. 소재의 상징성, 화가의 개인사, 시대적 조류와 당대의 화풍... 그림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해석의 장에 끌어들임으로써 팽팽한 긴장과 함께 예술적 호사를 만끽하는 것이다.


<통찰의 시대>의 저자 에릭 캔델은 20세기 서구의 문예사조를 주도했던 모더니즘에 주목한다. 그리고 ‘빈 1900’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링슈트라세’라는 해방적 공간은 예술가와 과학자, 사상가들을 한데 모이게 했고, 이들의 자유롭고도 지적인 대화 속에서 새로운 문화적 조류가 형성되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 슈니츨러의 저술, 클림트를 비롯한 화가들, 생물학의 진전 등을 배경으로 빈은 새로운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일상생활의 제약과 위선에 대한 반발’, ‘합리성에 대한 반발작용’으로서의 모더니즘이 탄생했다. 저자는 특히 클림트, 코코슈카, 에곤실레에 비중을 둔다. 회화에 있어서 이들의 새로운 시도는 극적인 충격과 함께 심리를 꿰뚫는 이미지를 제공하여 관람자를 그림 속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저자는 3명의 화가들이 남겨놓은 낯선 이미지들을 통해 이들이 예리한 관찰력으로 ‘통찰’했던 것들을 안내한다. 죽음, 절망, 무의식적 불안과 본능적 충동, 일그러진 성욕 등 그동안 주목된 바 없었던 인간 내면의 본능을 대담하고 독특한 화풍으로 그려낸 이들 화가의 선구적 가치를 조명한다. 그리고 화가들의 개인적 삶의 역사와 사회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는 저자의 해석과 탐구를 보다 타당하게 만든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저자에 따르면 화가의 통찰의 산물인 그림은 다시 관람자의 통찰을 요구한다. 예술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화가와 관람자 사이의 ‘무의식적 의사소통’이며 관람자는 ‘뇌에서 이미지를 무의식적으로 재창조’하는 것이다. 저자는 인지심리학과 생물학적 지식(뇌 과학)을 동원하여 이를 증명한다. 시각계의 정보처리는 상향처리과정과 하향처리과정을 거치며 관람자의 뇌 속에서 내면적 대화로 이어진다. 시각계 초기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전자는 관람자들 사이에서 거의 동일할 수 있지만 기억을 통해 사전 경험과의 비교를 꾀하는 후자는 관람자들마다 독특하다. 두 원천의 시각 경험이 높은 수준의 시각처리과정을 통해 통합되는 동안 위대한 화가가 남겨놓은 이미지는 관람자의 뇌 속에서 재창조된다. 예술작품에 대한 감동은 단지 ‘감정’적인 것이 아닌 ‘인지’적 활동이 동시에 작용한 산물인 것이다. 저자는 클림트를 비롯한 코코슈카, 실레, 표현주의 미술이 각자의 개성적이고 과장된 기법을 통해 관람자의 감정적 기초요소를 자극하는 것은 물론 무의식적 부분을 의식적으로 자각하게 만듦으로써 깊은 쾌락을 선사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거울 뉴런’의 작용이라 할 수 있는 관람자의 ‘감정 이입’이 기능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예술 작품의 풍부한 감상에 요긴한 표현이다. 하지만 비단 예술에만 국한된 얘기일까. 우리의 일상적인 삶 역시 애매하고 모호한, 무의식적 표지들로 가득하다. 갑자기 급변한 상대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일상생활은 피곤해질 수 있다. 삶에 대한 통찰력 역시 긴요한 것이며 훈련될 필요가 있다. ‘예술은 생존에 중요한 사회적 감정적 단서들을 이해하는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저자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한편, 뇌의 생물학이 인간의 지각과 복잡한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아직 요원한 면이 있지만 과학적 해석이 보다 심화되고 확장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인간의 ‘통찰력’이라 불리던 것들은 ‘과학적 해석’ 속에서 그 위상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새로운 대화를 촉진’하는 ‘높은 새로운 지식의 원천’으로서의 과학은 예술의 자리를 넘어설 수 있을까. 이들의 공존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다(기보다 염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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