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자면, 연암처럼

박지원, <열하일기1,2,3> 북리뷰

by 루이

중국대륙의 마지막 왕조. '금전서미(변발)'라는 요상한 헤어스따일로 중국 한족에게 컬처쇼크를 안긴 만주족.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다 조선의 16대왕에게 기어코 삼전도의 굴욕을 선사한 나라. 덕분에 조선에서 존명배청, 북벌론의 기치를 내세우게 했던 오랑캐의 나라. 헌데, 한족에게 흡수되어 조만간 사라질 것만 같았던 야만족의 나라가 용케 살아남아 강희, 옹정, 건륭으로 이어지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듭된 '문자의 옥'은 실사구시의 고증학을 낳았다. 18세기 조선의 의식 있는 선비들에게 '존명배청'이란, 허울좋은 명목에 불과했음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 먼저 다녀온 절친들과 풍문으로만 듣던 '청'의 존재는 호기심 충만한 연암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금수저를 쥐고 태어났어도 함부로 입에 문 적 없던 연암은 신분의 고하, 귀천을 막론하고 사람의 심성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광문자전>, <민옹전>, <예덕선생전>) 혜안의 소유자였다. 신분제 사회구조 속에서, 그것도 기득권의 영역에 있던 연암이 자신에게 주어진 프레임을 벗어나 시대를 자유자재로 관조할 수 있었던 것은 여느 양반들과는 달리 출세가도에 큰 뜻을 두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여행은 누릴 자격이 있는 자들에게만 선물을 한움큼 안겨주는 법이다. 약관, 이립을 훌쩍 넘은 불혹의 나이에 떠난 연암의 여정은 그간 축적해 온 학문적 내공과, 백탑파 친구들과 함께 다져온 시대정신, 유연하고 개방된 친화력, 그리고 (불혹과 상관없이) 무엇에든 유혹될 준비가 돼 있는 호기심 등과 버무려져 진진하고 풍부하게 진행될 것이었다. 그간 좁은 조선땅에 갑갑하게 갇혀 있던 연암의 기개는 '한바탕 통곡할 만한 자리'인 요동 벌판을 지나는 순간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연암의 편견 없는 시선은 단정하고 반듯하게 정리된 청의 제도에 놀라고, 이용과 후생의 방법론을 깨우치게 한다. 조선의 양반들이 그리도 백안시하던 이들과 밤새 필담을 나누기 위해 슬그머니 숙소를 빠져나가던 모습에선 벗을 사귀는 연암 특유의 성정이 두드러진다.


우물 사용, 벽돌집 짓기, 기와 잇기, 가마 제도, 수레 운용 등에 대한 서술에서는 연암의 뛰어난 관찰력은 물론 그 운용의 원리까지 파악해 내는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간간이 끼어드는 연암의 특유의 유머와 해학은 이것이 과연 240년 전 조선에서 쓰인 글인가 믿기 어려울 정도다. 상갓집 에피소드, '기상새설'에 얽힌 사연, 정진사, 장복이, 창대 등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연암의 모습은 체통, 체면 따위에 얽매인 양반의 그것이 아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연암의 열린 시각이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중국의 장관을 논할 때이다. '깨진 기와조각'과 '똥거름' 이면에 담긴 무형의 가치를 읽어낼 줄 아는 지력이야말로 연안만이 지닌 열린 시선의 백미라 하겠다. 청을 오갔던 그 수많은 선비들 가운데 여기에 주목한 이가 과연 연암 말고 또 있었을까.


중요한 건 이러한 소소한 이야깃거리들까지도 놓치지 않고 깨알같이 기록해 두는 디테일에 있다. 연암의 붓끝을 통해 그려지는 인물들은 소설 속 인물들마냥 생생하게 살아있으며, 이는 대접받은 술과 요리들 하나하나까지도 기입해 두고, 벼룻물이 없으면 술이라도 선뜻 쏟아붓는 글쟁이 특유의 고질적 습관의 소산이라 할 만하다.


압록강을 건너 요양, 심양, 산해관, 그리고 북경. 근 두 달을 내달려 가까스로 북경에 도착한 조선의 사신일행에게 초유의 미션이 떨어진다. 황제의 생파(생일파티) 장소는 북경이 아닌 열하(熱河), 피서산장이다. 그러니 사신들은 생파 장소로 급선회할 것. 단, 황제의 생일 이전에 도착해야 함. 북경에서 열하까지는 표면상 400리(실제는 700리), 280km. 남은 날은 약 열흘. 지칠 대로 지친 일행은 서둘러 열하원정대를 꾸린다. 산 넘고 물 건너(일야구도) 풍찬노숙을 감수하며 닷새 만에 도착한 열하... 황명이 아니었던들 연암의 ‘열하’일기는 세상 빛을 못 보았을 에피소드 한토막이다.


열하에서의 최고 이벤트는 단연 황제의 고희연(古稀宴). 각국의 외교사절단들이 공물을 상납하고 화려한 볼거리와 의식이 행해지는 웅장한 축제의 한마당. 하지만 조선 사절단의 목전에 놓인 이벤트는 남달랐다. 황제의 절친(?)이자 스승이라 일컫는 서번의 반선(판첸라마), 액이덕니(이름도 요상스런)에의 알현. 불교인지 도교인지, 근본도 모를 술법과 주문을 외워대고 환생을 거듭하여 생을 이어간다는 전대미문의 생명체를 만나 고개를 조아리라고? 억지춘향으로 왕래는 할지언정 140년이 지나도록 일관되게 청을 멸시해온 조선의 사대부에게? 더군다나 이교도 오랑캐가 하사한 금불상들은 장차 어찌할 것인가. 조선에 돌아가면 그 지탄을 다 어쩔 것이며... 사신이 고개를 조아린 대상은 활불(活佛)이었나, 황제의 조서였나...


이런 시답잖은 일들로 조선의 사신들이 설왕설래를 하는 동안 대국의 황제는 보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중원을 중심으로 만주, 몽고, 서번, 위구르 등지에 이르기까지 복속하여 그야말로 ‘팍스 시니카’ 시대를 구가하던 청의 건륭제에게도 안팎의 근심은 여전했던 것이다. 황제가 피서를 명분으로 만리장성을 벗어나 해마다 열하에 머무는 까닭은 호시탐탐 요동을 넘보는 몽고의 기세를 천자 자신이 친히 제압하려는 속셈이었다. 억세고 사납지만 황교를 경외하는 서번족에게는 황제가 몸소 그 종교를 받들어 모심은 물론 황금전각을 지어 우두머리를 예우함으로써 그 기세를 다스렸다. 나라 안의 백성들은 세금으로 다스리고, 깐깐한 사대부들에겐 주자의 학문을 미끼로 던져 그들만의 리그전을 치르도록 내버려 두는 전술을 발휘했다. 조선의 사신들에게 내려진 전무후무한 융숭한 대접(군기대신 파견, 반열 재정비, 연회 참석 및 선물 하사 등) 역시 훗날을 내다본 황제의 묘수이거늘.


건륭제의 교묘하고도 뛰어난 통치술은 의뭉스런 연암의 시선에 그대로 포착된다. 사신의 행렬에서 비껴나 있던 연암은 천하의 대세를 예리하게 파헤쳐 나가는 한편, 우물 안에 갇힌 조선의 좁은 식견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대저 조선의 사대부란 어떠한가. 동이(東夷)에 불과한 이들이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오랑캐들을 멸시하고 주자의 도를 논한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더니, 주자의 학은 조선에 머무는 동안 종교적 도그마가 되고 편협한 배타주의로 변질되었다. 지위와 문벌에 얽매이던 천박한 습속이 변방에 이르면 집안 망신이 된다. 명색이 사신의 이름으로 파견된 자들이 예법을 무시하고 무례한 언사를 되풀이하며 풍속 이면에 담긴 진실을 간파해 내지 못한다. 상투 한줌과 넓은 도포자락을 뽐내며 상대의 문화를 업신여기는 행태는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家의 망신이다.


보잘것없는 포의지사로 사신의 행렬 끄트머리에 섰던 연암의 식견은 그리하여 더욱 빛이 난다. 그리고 그가 남긴 디테일한 기록은 그 가치가 배가될 수밖에 없다. ‘한가하게 놀려고 따라온 사람이니’ 아무도 연암의 의견을 묻지 않았음에도 연암은 스스로 그 궤도를 벗어나 보고, 묻고, 들으며 집요하게 격물(格物)하였고, 뛰어난 통찰력과 기지를 발휘하여 역사와 대세, 처세를 읽어나감으로써 치지(致知)의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는 말안장에 앉아 졸면서도 생각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써내려간 연암의 시나리오 덕분이었다. 정치, 종교, 역사, 경제, 문화, 음악, 외교.., 다방면을 두루 통찰했음에도 대거리할 이 없는 우물 안으로 돌아가는 동안 연암은 어쩌면 요동쯤에서 한바탕 통곡을 하고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연암 골짜기 어디쯤에서 도를 닦으며 마음을 달랬는지도.


벼슬자리는커녕 생업에는 손방이었을 서생. 할 줄 아는 일이라곤 주구장창 서책을 읽거나, 백탑 아래 삼삼오오 모여 시문이나 사상을 논하는 것이 전부였던 한량과도 같은 생활. 그러나 선현이 남긴 지혜를 읽고,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현실과 미래를 통찰하여 시대적 당면과제를 예리하게 짚어내고 제시하는 것이 당대의 지식인, 즉 선비의 역할이었다고 한다면, 열하일기를 남긴 연암이야말로 진정한 선비의 본보기였다 할 뿐만 아니라, 그의 열린 정신은 21세기에도 충분히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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