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 있었기에 김혜리의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를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신형철이 말했듯, 비평가가 듣고 싶은 찬사 중 “당신의 글을 읽기 위해서 그 작품들을 봤어요”라는 말만큼 고무적인 것은 없으리라. 신형철의 평론을 읽기 위해 해당 작품을 읽은 적이 있는 나로서는, 그가 “당신처럼 써보고 싶어서 영화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어요”라고 말하는 대상 즉 김혜리의 글을 놓칠 수 없었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세월을 줄곧 <씨네21>에서 글을 써온 사람인 만큼 김혜리,라는 이름은 익숙할 수밖에 없다. 말이 20년이지, 그러니까 내가 첫 직장을 얻기 얼마 전부터, 연애-결혼-출산을 거쳐 (청소년기에 접어든) 아이와 지지고 볶는 전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지금까지, 그녀는 줄곧 영화와 글,이라는 한 우물(아니 두 우물)만을 파온 셈이다.
90년대는 대한민국 대중문화계가 약진하는 시기였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그 변화의 혜택을 맘껏 입은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당시에 창간된 '이제껏 없던' 형식의 잡지들을 탐독하는 것도 그 수혜의 폭에 포함된다.
기억을 더듬어보자, 기억을. 소위 종합대중문화예술잡지(표현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로 명명되는 <페이퍼>, <이매진>, <상상>, <리뷰>, <오늘예감>, 그 외 각종 '간지(?)나는' 무크(mook)지들을. 물론 영화 잡지 <씨네21>과 <키노>도 빼놓을 수 없고.
당시 <이매진>(1996)을 창간한 소설가 주인석 씨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문화적 소비 욕구'를 채워주는 잡지 정신을 지향했던 90년대의 정서와 흐름을 상기하게 된다.
"<창비(계간 창작과비평)>와 <문지(문학과지성)>는 문자, 이데올로기, 문학의 엄숙함에 경도됐던 세대가 만들었던 잡지였다. 그에 비하면 내가 속한 세대는 정치 지향의 세태가 해체되는 걸 지켜보고, 경제적 풍요를 누리면서 영상, 소비,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았다. 이 세대에겐 이들이 잘 아는 언어로 우리 시대를 얘기할 잡지가 필요했다." (한겨레, 1996. 6. 19)
그러니까 '문화적 소비 욕구'에 목말랐던 청춘들 중 하나였던 나는 특히 <페이퍼>와 <씨네21>을 꼬박꼬박 사보곤 했는데,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생각 있는' 기획과 '있어 보이는' 콘텐츠, 신선한 편집 디자인도 한 이유였겠지만, 그 '있어 보이는' 내용을 더 도드라지게 만드는 몇몇 특출한 필자들의 개성 넘치는 필력 때문일 확률이 더 높다.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 이름들은 <페이퍼> 출신의 황경신, 이충걸, 정유희 등. 독특한 인물로 따지자면 <페이퍼>의 발행인 김원(일명 두령)과 <페이퍼>를 거쳐간 만화가 박광수도 빼놓을 수 없지만. 재기 발랄하고 창의적인 언어 감각에서부터, 남다른 주제를 풀어 헤치는 신선한 통찰력까지, 이들이 두루 갖춘 덕목은 새로운 흐름과 부합했다.
<씨네21>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혔는데 아무래도 영화 전문 잡지여서 그랬는지 기자 이름이 적힌 바이라인(by-line)에 특별히 눈길이 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90년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먹고 살기 바쁘다’는 진부한 핑계로 애독하던 잡지와 애청하던 CD들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었지만, 드문드문 보고 들어온 <씨네21>의 몇몇 기자 이름은 익숙하다. 창간 멤버인 김혜리 기자가 그랬고, 김도훈, 주성철 기자 등도.
한 분야에서 꾸준히 글을 써온 이들의 전문적 내공이야 말할 것도 없을 테고, 세월의 더께를 두르고 숙성하는 인간의 시선과 사유가 얼만큼 단단하게 글 속에 녹아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리저리 오가는 생각들의 교차점에서 읽은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를 한마디로 정리하라면 “당신을 보는 나를 바라보았다” 정도가 될 것이다. 타인의 벼려진 연장(글)을 보며 나의 무뎌진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이랄까.
서문에서 저자는 영화 <문라이트>의 작가 터렐 앨빈 맥크레이니의 인터뷰를 인용해 자신의 태도를 대변한다.
“그날부터 주의를 기울이자고 결심했어요. 내가 없으면 세계도 없다는 걸,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지 않으면 소중한 좋은 것들이 사라져버린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15초 앞으로’ 버튼을 눌러 맥크레이니의 이 말을 다시 들으며 옮겨 적는다. 주시하지 않으면 영화는 내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본 것을 적어두지 않으면 보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나 되어버린다는 두려움은 2010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씨네21>에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를 일주일에 한 번씩 연재한 동력이었다.”
- 김혜리, <나를 바라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어크로스, 2017, 서문 중에서
김혜리의 일기,가 아니라 영화의 일기,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라고 이중 부호를 매겨야 정확한 뉘앙스가 살아날 것이다. ‘김혜리’는 다만 “매일 영화가 보여준 것을 적어두는 속기사”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볼 때마다 “다시 한 번 살아보기를 결심하고 있다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힌다”는 고백은 왠지 남의 것 같지 않다.
“영화가 아직 내 안에 흘러 다니는 동안 쓰고자” 한다는 것이라든가, “영화는 내가 유일하게 아는 (잠을 제외한) 임사(臨死) 체험이자 임생(臨生) 체험을 제공”한다는 표현을 가만 들여다보면 ‘영화’ 자리에 놓일 수 있는 등가의 대체 단어로 ‘책’만큼 부합하는 것도 없지 않나 싶다.
그래서, 그녀의 문장들이 아른거리며 내 안에 흘러 다니는 동안 나 역시 쓰고자 한다. 그녀에게 임사체험이자 임생체험의 장인 영화를 액자소설처럼 꾸려 넣은 (것 같은) 이 책은, 한 다리 더 건너, 내게 (영화라는 액자소설을 통한) 임사체험이자 임생체험을 제공하는 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테이크는 지속되는 동안 현재진행형의 삶이며 편집은 한 쇼트의 죽음이자 다음 쇼트의 탄생이다. 죽음이 삶에게 그러하듯, 쇼트가 끝나기 전에 우리는 그 생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인간은 삶에 포함돼 있지 않을 때 그것의 전경을 조감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이 유용하다. (서문 중에서)
영화가 끝나면 “내 몫의 지루한 원 테이크 영화, 그러니까 일상 속으로 황홀하게 비척이며 돌아온다”는 그녀의 비유는 ‘자기 몫의 지루한 원 테이크 영화’를 찍어내고 있는 무수한 다른 ‘나’들에게 애잔한 공감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본인 스스로 “독자들에게 일종의 전기수(傳奇叟)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처럼, 그녀의 글들은 “눈 밝고 생각 깊은 영화의 평자들에게 시시콜콜한 1차 자료로 쓸모 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영화(텍스트)를 통해서도 눈을 밝히고 생각을 확장하고 싶은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실제로 우리의 자아는 우리를 접대하고 가르치려고 작심한 상대가 아니라 예기치 못하게 부딪히고 부대낀 것들에 의해 딱지를 떼고 형태를 잡아나간다.
(…) <와일드>에서는 매일 짐을 지고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행위 자체가 본론이다. 사람들은 재회의 기약 없이 스쳐가고 일화들은 매끈한 서사를 이루기 위해 연결되지 않는다. 셰릴의 여행에는 목표가 없다. 여행 자체가 목표다. 출발 22일째는 23일째를 위한 준비일 뿐이다.
(…) 여행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은 길 위의 경험과 사색, 우연히 마주친 현자의 교훈을 종합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이례적으로 길고 호된 물리적 고역의 ‘부작용’으로서 계시처럼 닥친다.
- 같은 책, '여행의 기술, <와일드>’ 중에서
영화 <와일드>에 대한 글에서 그녀는 여행을 이야기한다. ‘여행’을 ‘삶’으로 치환해 읽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여행 자체가 목표인 것처럼 삶 자체가 목표인 삶을 환기시키며. 다른 글들을 읽으면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영화 <브루클린>에 대한 글에서 저자는 자신의 유학 생활을 회상한다. 낯설고 고독한 환경에서 위축된 자신을 어떻게든 세우기 위해 부모님과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일(새로운 풍경과 인물들을 묘사하는 문장을 쉴 새 없이 지어내고 그것들을 모아 종이에 옮기는 작업)에 관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가까운 이들에게 안부를 전한다는 목적이었지만 내가 그토록 성실히 편지를 쓴 진짜 이유는 현실에선 미력할지언정 내가 그 모든 혼란스러운 경험의 주인이라고 고집하는 안간힘이었던 것 같다.
- '삶을 지어올린 곳, <브루클린>' 중에서
먼 과거, 뉴욕에서 잠시 체류하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나 역시 그러한 ‘안간힘’의 일환으로 병석에 누워 있는 엄마에게 거의 매일 편지(를 빙자한 일기)를 썼다. 표면적으로는 자세한 일과와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통해 (늘 딸내미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었던) 엄마를 위로하기 위함이었을 테지만, 이면에는 그 모든 혼란한 감정과 흐르는 시간을 맥없이 스러지는 것으로 방치하고 싶지 않은 마음, 어떻게든 매몰되지 않고 포착할 만한 무엇이라도 건져 올리고 싶은 절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잠시 ‘나’라는 집을 받치고 있는 지층의 ‘표층과 심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사정이 이와 같으니,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를 읽으며 ‘당신을 보는 나를 바라보았다’라는 말로 이 한 권을 수렴한다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김혜리가 보는, 아니 김혜리를 보는 '영화들'을 바라보면서.
(20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