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클리볼드의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여기 희귀한 책이 있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강렬한 제목. 피해자의 이야기를 담은 책은 있어도 가해자의 이야기를 담은 책은 드물다. 아니, 거의 보지 못했다. 1999년 미국을 발칵 뒤집어놓았던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 중 한 명이자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학생 ‘딜런’의 엄마 ‘수 클리볼드’가 쓴 책이다.
제목에 이끌렸으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책, 선뜻 읽기가 두려워지는 책이기도 했다.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없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은 없다,고 단언할 만한 일조차 어쩌면 없는 게 아닐까.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다큐멘터리를 찍다가 극영화로 선회한 키에슬로프스키의 술회를 인용하면서 우리 역시 어떤 두려움 때문에 "진짜 눈물"로부터 도망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썼다.
"진짜 눈물은 두렵다. 사실 내게 그 눈물을 찍을 권리가 있는지조차도 모르겠다. 그럴 때 나는 내 자신이 한계 바깥의 영역에 있음을 알게 된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내가 다큐멘터리로부터 도망친 주요 이유이다."
- 슬라보예 지젝, <진짜 눈물의 공포>, 울력, 127-128쪽.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280-281쪽에서 재인용)
이 책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풀리지 않는 의문을 붙들고 처참한 시간을 살아낸 한 여성의 고통스러운 내면의 기록이자 ‘진짜 눈물’이기도 하다. 자신의 삶과 정체성을 송두리째 앗아간 참담한 비극 이후의 생. 살아남은 자의 고통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 슬픔마저 오롯이 느낄 수 없는, 온전한 애도마저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오는 고통이다. 살인자의 엄마,라는 딱지를 주홍글씨처럼 달고 남은 평생을 살아야 하는 이에겐 자식의 죽음을 마음 놓고 애도할 수 있는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럴 만한 개연성, 납득할 만한 동기가 있어 차라리 체념적 수용이라도 가능했다면 상황은 좀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 극악무도한 참극의 배후에 있는 불편한 진실은, ‘좋은 가정’에서 걱정 없이 자란 수줍음 많고 호감 가는 젊은이가 그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반비, 2016, 6_'어린 시절' 중에서
화목하고 안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순탄하게 자라온 한 청소년과, 극악한 학살 사건의 범인 사이엔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불가해한 강이 흐른다. 딜런의 엄마 수 클리볼드는 아들의 치밀한 범행 계획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그럴 만한 여타 신호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영리하고 사리분별력 있고 남을 배려하는 평소 사랑스러운 아들의 이미지를 끝내 내려놓지 못한다.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는 이 ‘알 수 없음’에 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길 없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모름’의 사태.
이 책의 해설을 쓴 앤드루 솔로몬의 글은 훌륭한 서문이자 곧 총론이다. 극단적인 범죄의 동기를 설명할 때 흔히들 내놓는 외상에 의한 트라우마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훨씬 깊고 복잡한 비논리’에 주목한다.
딜런은 우울했지만 조현병이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양극성장애 같은 정신의학 진단기준에 들어맞을 만한 병은 없었다. 사고 장애가 있었다고 해서 딜런이 벌인 행동의 사악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이 훌륭한 점은 딜런의 행동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 클리볼드는 이 일을 집단 괴롭힘이나 학교, 아들의 건강 상태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쉽게 설명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수 클리볼드의 최종적인 결심이 드러난다. 클리볼드는 ‘악’과 ‘병’ 사이의 확정할 수 없는 경계를 명료하게 밝히려고 애쓰지 않는다.
수 클리볼드는 아들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기는 몰랐기 때문에 잘못이 면제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자기가 몰랐기 때문에 아들과 세상을 저버린 셈이 되었다고 한다.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차라리 죽는 게 최선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이의 죽음은 부모의 절망이다. 이 애도의 책을 통해 수는 대신 참회하려 한다. 미움이 사랑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실제로 미움과 사랑은 늘 같이 간다.
- 해설 중에서
#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이 책은 오직 자신의 고통을 동력으로 삼아 세상에서 그녀 자신이나 그녀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이 죽인 희생자들이 겪은 고통을 줄어들게 하려는 기록, 즉 수용의 이야기이자 투쟁의 이야기일 뿐이다”라는 해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 두터운 책을 끝까지 읽은 독자에게 아프고도 투명하게 다가갈 것이다.
저자가 말했듯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일부는, 어쩌면 속죄였을 것이고, 일부는 자기 보호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저에는 ‘모름’에 대한 ‘그저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자리하고 있음을 나는 짐작한다. 이 막막한 상황 즉 ‘도무지 알 수 없음’이라는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알고자 하는 처절함’뿐이라는 뼈 아픈 독백. 읽는 내내 마음이 시렸다.
아마 누구나 지식과 자원의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유일한 사실은 우리가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딜런이 학살에 가담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모르는 것은 이 사실을 딜런이 죽인 이들의 가족에게 과연 어떻게 전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 같은 책, 17_'선서증언' 중에서
알고자 하는 모질고 처절한 과정에서 저자가 수렴해낸 납득할 만한 단어는 ‘뇌 이상’이다. 사건 이후 그녀 자신이 (엄청난 공황발작과 불안장애를 겪으며) 망가진 사고와 정신 속에 갇힌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했기에, ‘살인-자살’은 살인의 문제인 동시에 자살의 문제임을 깊이 인식했기에, ‘자살은 병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사회의 끈질긴 믿음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저자는 자살 예방과 유족 모임에 참여하고 살인-자살 연구에 깊숙이 파고든다.
살인-자살 유족은 비극의 동인이 자살이라고 생각하지만 대중은 그런 행동을 오직 살인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살인-자살이 자살의 한 형태라고 보고자 하는 까닭은 자살 방지가 살인-자살 방지이기도 하다는 걸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 지금 나는 불안은 내가 평생 함께 살며 관리해야 할 뇌의 이상이라는 걸 안다. (…)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내 불안에 귀를 기울이고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일러주는 지표로 인식하게 되었다. (…) 슬프고도 무서운 진실은 언제 우리가(혹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이) 심각한 뇌 건강 문제를 일으킬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 같은 책, 18_'뇌 건강과 폭력의 교차점' 중에서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없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왜’에만 매달리기보다 ‘어떻게’라고 물어야 함을 이 책은 넌지시 말하고 있다. 저자는 ‘왜’라는 질문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어떻게’라는 질문으로 그간의 시간을 신중히 복기한다. 명쾌한 하나의 원인보다는 무수한 원인-결과의 과정에서 빚어지는 모호하고도 우연한 (그 모든 생물학적, 신경의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역학관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듯하다. 물론 이 힘겨운 작업을 가능케 한 것은 (아들이 일으킨 비극적 참사에도 불구하고) 아들 딜런에 대한 사랑이다. (그 사랑이 너무나 눈물겨워 나는 간간이 눈물을 삼켜야 했다.)
이 책은 어둠이다. 어둠에 뛰어든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저자가 위험에 뛰어든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멀쩡한 바닥이 무너지며 갑자기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어둠 속의 희미한 빛과 촉각에 기대어 그 어둠을 통과해나간다. 그 힘은 아이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다. 나는 이 책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고 싶지 않았다. 인생이란 많은 부분이 설명할 수 없기에 평소엔 살짝 가려져 있을 뿐 막막함은 본질이다. 그 막막함을 통과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책이다.
-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서천석
# 자기 삶의 고통에서 비롯한 광대역의 정서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도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납득할 만한 상황이든 불가해한 사태이든. 저자는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이다. 살인자의 어머니이니 희생자들에겐 가해자일 것이고, 자식을 자살로 잃은 어머니이니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녀의 끔찍한 고통을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녀가 죽지 않고(자살하지 않고), 숨지 않고(유폐되지 않고) 남은 생을 걸어가는 모습을 지지하는 것은 가능하다. 저자의 ‘진짜 눈물’을 읽어내고, 사건 이후 16년이라는 신산한 여정을 거쳐 ‘진짜 용기’를 찾기까지 ‘공감’과 ‘공동체’의 힘이 크게 작동했음을 읽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편지들을 통해 더 넓은 세계에 있는 사람들과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극단적인 고통과 상실을 겪고 있었다. (…) 마치 인간의 보편적 시련이라는 깊은 샘의 수맥을 건드린 것 같았다. 날마다 사람들의 공감력과 너그러움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자기 삶에서 겪은 고통에서 비롯한 광대역의 정서를 가진 사람, 이해의 폭이 넓고 깊은 사람들이었다.
- 같은 책, 7_'엄마가 엄마에게' 중에서
자기 삶의 고통에서 비롯한 광대역의 정서. 나는 이 말을 되새긴다. 어쩌면 우리는 이 ‘광대역의 정서’를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지 모른다.
이제는 반폭력과 뇌 건강 문제 활동가로 살고 있는 저자는 ‘취약성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고, ‘우리가 완전히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의사결정 능력이 변화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환기하고자 한다.
‘육아를 일반화할 수 있다는 관념’이 거대한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는 역자 홍한별의 후감도 매우 인상적이다.
육아책 등에서 당연하게 ‘보통 아이’를 상정하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이들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잊고 아이를 바라볼 때가 많다. 아이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어른들만큼이나, 아니 아직 사회화가 덜 되었으므로 그 이상으로 다양하고 개성 있는 존재들일 것이다.
(…) 부모가 되는 일은 세상 최대의 축복인 동시에 부모가 되는 순간 세상 최대의 약점을 갖게 되는 천형이다. 2년 전에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바다에서 죽은 뒤에 나는 아킬레스건이 노출된 것처럼 약해져서 툭하면 울었다. 이 책이 일깨우는 것도 모든 부모들이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이다. (…)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고민 때문이 아니라, 아이가 행복한지 안녕한지에 나의 존재가 위태로이 직결되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닥쳐오는 실존적 불안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마지막 문장에서 역자의 깊이를 가늠한다. 아이의 행복과 안녕에 위태로이 직결된 나의 실존적 불안. 역자 홍한별은 '부모'라는 위치에서 겪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실제로 체감한 사람일 것이다. 적어도 저자의 내면 세계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성숙한 번역자의 태도를 지녔거나.
출간된 지 1년이 지나도록 읽을까 말까 여러 차례 망설였던 이유도 아마 이 ‘실존적 불안’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체감한 ‘부모로서의 실존적 불안’이 극단적인 형태로 상기될 수 있음을 감지했기에. 그것이 가져올 고통스러운 감정의 여파가 두려웠을 것이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를 궁금해하면서도 선뜻 보지 못한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책을 집어 든 이유(그리고 끝까지 불편한 마음으로 읽어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실존적 불안을 ‘극복’하기보다 평생 ‘껴안고 살기’로 결심한 한 엄마의 이야기가 (또 다른 엄마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궁금해서였을 수도 있고, 고통에 처한 인간이 어떻게 두려움을 대면하고 직시하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며 또 다른 체득의 계기로 삼아볼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책을 덮으며 한 가지 추가된 것이 있다면 ‘공동체의 복원력’을 믿고 싶다는 희망이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