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친절한 소설가 이기호

이기호 소설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모욕을 당할까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는 삶에 대해서.

나는 그게 좀 서글프고, 부끄럽다.


- 이기호,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최미진은 어디에」




미뤄왔던 이기호의 소설을 읽었다. 그의 파격적인 등단작 「버니」(1999)를 읽은 이후, 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집 『한정희와 나』(2018)에 수록된 그의 소설을 읽기까지 상당한 시간적 거리가 있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2년 전의 라디오 방송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해 출간된 소설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2018)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생활인으로서의 이기호와 소설가로서의 이기호 사이에서 고민하는 작가의 솔직한 심정에서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이기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마이너리티에 대한 시선으로 웃기면서도 서글픈 소설을 쓰는 재미있는 이야기꾼. 그의 화법은 여전히 유머러스했지만, 윤리와 환대의 문제를 피상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에서 실마리를 찾으려는 최근의 태도는 신선하면서도 진솔하게 와 닿았다. 아이들을 키우며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가는 남자의 생활과, 사회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작가적 의무감 사이의 괴리감. 마침 코로나19 팬데믹이 절정에 달하는 시기였고, 나 아닌 타자를 수용하고 환대한다는 것이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어디까지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 소설가 이기호와 소설 속 이기호 사이에서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는 윤리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다른 때보다 좀더 묵직하게 얹히는 소설집이다. 표제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를 비롯하여 황순원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한정희와 나」와 「권순찬과 사람들」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첫 번째로 수록된 「최미진은 어디에」라는 작품은 ‘역시 이기호’라는 말이 튀어나올 만큼 신선하다. 작가의 머리말인 줄 알고 읽었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은 생각에 살펴보니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문 작가의 의도에 내가 제대로 말려들었음을 뒤늦게 인식한다. (소설가 ‘나’의 이름이 ‘이기호’로 등장하기 때문에 깜빡 속았던 것.)


「최미진은 어디에」와 책의 마지막에 실린 ‘이기호의 글’은 묘한 수미상관 구조를 보여준다.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낄낄 웃다가, 작중 인물(혹은 작가)의 억울함과 무력감을 함께 느끼게 된다. 심지어 ‘이기호의 글’이 작가 이기호의 말인지 작중 인물 이기호의 말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윤리에 대해 말하는 작가 이기호의 소설 세계와, 의도하지 않았으나 비윤리적 상황에 처한 생활인 이기호의 난감한 현실. 그 사이의 괴리감을 이토록 재미있고 씁쓸하게 다룬 솜씨라니.


소설에 등장하는 ‘이기호’와 소설을 쓰는 ‘이기호’ 사이에는 과연 어떤 벽이 세워져 있는가? 그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존재이고, 개별적이며 고유한 영혼을 지닌 인물인가? (…) 소설 속 인물의 이름만 ‘이기호’라고 한다고, 어찌 그 벽이 허물어지겠는가? 오히려 그건 또다른 알리바이로, 또다른 벽 뒤로, 나를 데려다 놓았을 뿐이라네. 오히려 이중 삼중의 벽 뒤에 숨은 느낌이지…… 결정적으로 나는 소설 속 ‘이기호’가 느낀 부끄러움을, 뒤에서 가만히 바라만 봤다네. (…) 남은 게 무엇인지 아는가? 계속 ‘부끄러워하는 자’와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자’뿐이더군. 부끄러움에 대해서, 환대에 대해서, 윤리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늘 뻔한 내가 있더군.


- 같은 책, ‘이기호의 말’ 중에서


# 고통을 이해하는 것 vs. 고통을 바라보는 것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한정희와 나」에서도 소설 속 화자 ‘나’는 소설가이다. 어린 시절 어려운 처지에 있던 아내에게 무조건적 환대를 베풀어주었던 한 노부부의 손녀 ‘한정희’를 이번엔 ‘나’와 아내가 잠시 거두게 된다. ‘나’는 한정희에게 조건 없는 환대를 베풀지만 뜻하지 않은 일(한정희가 학교폭력위원회에 가해 학생으로 회부되는)에 휘말리게 되면서 딜레마에 빠진다. 소설 속 ‘나’의 입을 빌어 소설가로서 느끼는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환대’에 대한 문제를 고백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작가로 십오 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나는 다른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또 써왔다. (…) 그래도 내가 가장 많이 쓰고자 했던 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걸 쓰지 않는다면 작가가 또 무엇을 쓴단 말인가? (…) 작가는 숙련된 배우와도 같아서 고통에 빠진 사람에 대해서 그릴 때도 다음 장면을 먼저 계산해야 하고, 또 목소리 톤도 조절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아서 고통스러웠던 적이 많았다. 그게 잘 되지 않는 고통…… 어느 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고통이란 오직 그것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쩐지 내가 쓴 모든 것이 다 거짓말 같았다.


- 같은 책, 「한정희와 나」 중에서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해서 쓰는 것이 아닌, 누군가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쓰는 글. ‘나’는 그런 글들을 써온 것에 대해 고민한다. 이해하다,와 바라보다,의 사이. 나는 소설 속 ‘이기호’의 입을 빌어 말하는 작가 ‘이기호’의 고백을 묵묵히 듣는다. 나 또한 그의 고백을 ‘이해해서’ 쓰는 것일까, 아니면 ‘바라보면서’ 쓰는 것일까.

‘이기호’는 ‘환대’에 대해서도 말한다.


내겐 환대,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느 책을 읽다가 ‘절대적 환대’라는 구절에서 멈춰 섰는데, 머리로는 그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마음 저편에선 정말 그게 가능한가, 가능한 일을 말하는가, 계속 묻고 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우리의 내면은 늘 불안과 절망과 갈등 같은 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법인데, 자기 자신조차 낯설게 다가올 때가 많은데, 어떻게 그 상태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나는 그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 자신이 다 거짓말 같은데…… (같은 책, 「한정희와 나」)


작가가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절대적 환대'는 자크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일 것이다.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환대는 데리다가 말하는 절대적 환대의 조건들이다. 그렇다면 구체적 현실 세계에서 이러한 환대는 어디까지 가능할까.


화자인 ‘나’는 자신이 한 일을 반성하지 않는 한정희에게 순간 폭발한다. (아이에게)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 그리고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을 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 작품의 마지막 세 문장을 옮겨본다.


이렇게 춥고 뺨이 시린 밤, 누군가 나를 찾아온다면, 누군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때 나는 그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그때도 나는 과연 그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까? 그 생각을 하면 나는 좀처럼 글을 잘 쓸 수가 없었다. (같은 책, 「한정희와 나」)


타인, 모욕, 환대, 부끄러움, 윤리와 같은 키워드들이 이기호 소설의 미학인 ‘유머’를 통해 독자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무조건적 환대는 가능한가? 책으로 윤리를 배울 수 있는가? 소설로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기호는 답한다. 불가능하다는 것. 그러나 그 불가능성을 깨닫는 것이 소설이나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라는 것. 이 책의 마지막 두 문장은 다음과 같다.


진실이 눈앞에 도착했을 때, 자네는 얼마나 뻔하지 않게 행동할 수 있는가?
나는 아직 멀었다네.


부끄러움을 이야기하는 그의 화법 속에서 나 또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으니 어쩌면 작가는 성공한 것인지도 모른다. 작중 인물들 속에서 어렵지 않게 나의 초상 한 부분을 마주치게 되었으니 말이다.


여기, 신형철 평론가의 적확한 표현이 있다.

“이런 무거운 소재 앞에서도 이야기꾼의 어조와 호흡을 절묘하게 운용하면서 시종 희비극적이라고 해야 할 어떤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이기호 소설이 특징이다.”

- 『스무 해의 폴짝』(마음산책)에서 재인용


# 환대에 대하여

이번 소설집에서 도드라지는 특징 중 하나는 주위에서 흔히 볼 법한 ‘인물들의 이름’이다. 최미진, 권순찬, 강민호, 한정희 등등. 평론가 김형중은 이를 ‘고유명사의 윤리’라는 코드로 읽어낸다.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환대의 윤리’를 끌어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책의 말미에 수록된 (내가 신뢰하는 평론가 중의 한 사람인) 김형중의 해설은 (자칫 무게감이 덜해 보일 수도 있는) 이기호 소설의 톤에 깊이를 더해준다.


한 인물에게 고유한 이름과 사연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범주 내로 동일화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동일자로 환원되지 않는 자, 곧 절대적 타자만이 고유할 수 있다. (…) 그러므로 고유명사의 윤리는 타자를 항상 ‘나와 다른 자’ ‘짐작 불가능한 자’로 정의할 수밖에 없게 한다. 바로 그 짐작 불가능성을 유지한 채로, 타자를 나에게 이해된 바가 아니라 그 자신의 이름에 따라 호명하고, ‘차이 속에서’ 관계 맺는 것이 고유명사의 윤리다. (…) 이방인의 정체를 심문하지 않는 환대, 그 어떠한 조건도 없이 나와 다른 자(그래서 고유한 자)를 인정하고 맞아들이는 환대…… 그래서 환대의 윤리는 항상 무조건적일 수밖에 없다.


- 같은 책, 김형중의 해설, 「다시, ‘환대’에 대하여」 중에서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부끄러움’을 느낀다. 환대하는 자의 부끄러움과 환대받는 자의 부끄러움. 데리다를 참조하며 환대의 이율배반적 성격을 말하는 김형중의 문장들은 인상적으로 남는다.


(…) 말하자면 항상 부족한 환대, 항상 제한적인 환대, 항상 특정 조건과 상황 속에서만 실행되는 환대…… 무조건적 환대 같은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환대는 그래서 항상 부끄러움을 수반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부끄러움은 환대의 윤리에 대해 구성적이다. 환대하는 자는 항상 자신의 불철저한 환대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부끄러움 속에서 환대하라. (같은 책)



그러니 부끄러움 속에서 환대하라. 미증유의 코로나 시대. 극단적 이기주의로 수렴되는 인간의 불안과 배타성에 우려를 표하는 요즘, ‘윤리’와 ‘환대’의 문제에 이기호 식으로 접근한 소설들을 읽는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일로 보인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물론 이기호 표 유머는 기본 장착이다. 이 친절한 균형 감각. 누구에게나 친절한 소설가 오빠 이기호,라는 말이 떠오른 이유다.


(2020.9)



덧글. 메모장을 뒤적여보니 올 여름 그러니까 6월 초부터 9월 초까지 이기호를 언급한 메모가 대여섯 건이나 눈에 띈다. 나는 머릿속으로 계속 이기호의 소설에 대해 뭔가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최근 읽고 있는 문화인류학자 김현경의 책 『사람, 장소, 환대』와 맞물리는 지점이 있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레비나스를 통해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 '환대'의 개념. 환대를 생각할 때면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코로나로 인한 (국경 봉쇄 및) 이동의 제한, 난민, 성소수자 등의 문제가 여느 때보다 첨예하게 논의되는 때이다. '환대'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때인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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