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만(散漫)과 산란(散亂): 수전 손택 <사진에 관하여>
얼마 전 미술을 공부하는 친구의 부탁으로 '거울의 시선'에 관한 논문 초록을 영문으로 옮기게 되었다. 짧은 초록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나의 산만성은 어김없이 발휘되어 충실한 번역이라는 미명하에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거울'이나 '시선'이라는 모티프 자체도 흥미롭거니와 이 주제를 취할 수 있는 영역이 (비단 미술 분야뿐만 아니라) 사진이나 철학, 심리학, 문학 등으로 꽤나 넓게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 거울에 대하여
우선 라캉이 사용한 ‘거울단계(stade du miroir)’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는데, 자기 자신의 모습이 온전한 전체로 잡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울의 ‘반사’ 효과 때문이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신(실체)을 바라보는 것마저 ‘이미지’로밖에 파악할 수 없다는 것, 자신(거울 속 모습)을 보는 시선이 거울에 반사되어 다시 자신(실체)을 바라보는 것, 이러한 동시적 상호작용의 관계로 나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진다는 것 등을 생각했다. 사실 라캉이 말하는 거울 단계는 유아 단계에 대입되는데, 유아가 자신(신체)과 외부 대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거울에 투영되는 자신의 지속적인 ‘이미지’를 매개로 자신의 정체성을 분리해내고 이를 중심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미 이 단계에서부터 인간은 자기동일성(혹은 정체성)이라는 (착각이 주는) 안도감과, 어쩌지 못하는 (실체와 거울 속 이미지 간의) 간격으로부터 생겨나는 분열에 대한 불안감을 동시에 지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끔 내 주위에 보이지 않는 거울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나의 신체를 비추는 물리적 거울이 없더라도, 마치 거울이 있는 것처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미지’로 상상하며 행동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거울 단계 즉 유아 단계에 아직도 머물러 있는 상태인가. 프로이트의 표현을 빌자면 보이지 않는 거울이 ‘초자아’처럼 내면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카메라를 통한 시선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한 시선이 타인의 시선이며(거울 속 시선을 타자의 시선으로 전제할 때), 그리하여 자신의 욕망은 곧 타인의 욕망이 투영된 것에 불과하다는 라캉의 ‘대타자의 욕망’을 생각한다.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 같은 말도 떠올린다. 그러다 다시 ‘카메라를 통한 시선’으로 생각의 초점을 옮긴다. 거울을 통해 투사된 자신을 보는 것만큼이나 카메라로 담은 대상이 되돌려주는 ‘시선’ 역시 자신을 보는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수전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를 꺼내 뒤적인다. 내친 김에 그 자리에서 꽤 한참을 읽어나간다. 밑줄 그었던 부분을 다시 읽어본다. 발터 벤야민의 산만성(?)을 계승한 수전 손택의 글은 나처럼 산만해지기 쉬운 독자에게 안성맞춤이다. 심지어 이 책을 번역한 역자도 후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손택의 비판자들이 손택의 신간이 나올 때마다 절대로 빼먹지 않고 퍼붓는 욕설이 몇 가지 있다. '글이 산만하다' '장황하다' '아는 체한다' '앞에서 했던 말을 뒤에서 바꾼다' 등등이 그 중 대표적인 욕설인데, 결국은 모두 똑같은 말이다. 즉, 손택의 글이 쉽게 술술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손택이 어려운 표현을 쓴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글의 흐름이 전통적인 글쓰기 방식처럼 일직선으로(그러니까 서론, 본론, 결론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점은 손택 자신도 인정한 적이 있다. "제 사고 방식이요? 뭔가를 생각하려고 할 때마다 자꾸 다른 것이 생각나는 그런 사고 방식이죠." 어느 인터뷰에서 본인이 직접 밝힌 이런 사고 방식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것이 바로 이 책 <사진에 관하여>이다.
조금 웃음이 나온다. 공감의 차원에서.
카메라는 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카메라는 무엇을 보고 있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보는 행위를 부추기며, 보는 행위 자체를 변화시킨다.
- 수전 손택, <사진에 관하여>, ‘시각의 영웅주의’ 142p
카메라의 시선,이라는 관심 주제를 잠시 잊고 시선이 가는 대로 그녀의 글을 읽어나간다. 산만하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 대상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아름다워질 수 없는 피사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피사체에 뭔가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려는 사진 고유의 경향을 막아낼 방법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치 자체의 의미는 변할 수도 있다. (…) 이제는 다른 순간보다 더 중요한 순간도 없으며,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한 사람도 없게 된 셈이다.
- 같은 책 54p
어느새 나는 '사진을 찍는다'라는 말을 '글을 쓴다'는 말로 바꾸어 읽는다. '대상'과 '나'를 동시에 담아내는 것으로서의 '사진 찍기'는 '카메라의 앵글(시선)'에 의해 고유한 가치(의미)를 생산해낸다. 사건이라는 외부적 자극에 반응하는 '쓰기'는 '나의 언어(시선)'를 통해 (사건과 대상의) 실질적인 의미를 만들어가는 행위 아니던가.
# 현실은 우발적인 시선들의 총합이다
사진의 우발성은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해준다. 다시 말해서, 사진으로 된 증거의 자의성은 현실이란 원래 분류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역사가 낳은) 우발적인 편린들을 일정하게 합해놓은 것, 그것이 바로 현실이므로.
- 같은 책, ‘우울한 오브제’, 125p
총체적인 동일성으로서의 ‘나’를 의심한 이후로 나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 바꾸게 되었다. 즉 거울에 비친 온전한 전체로서의 나(의 이미지)를 향한 나르시시즘적 태도를 버리고, 범주화할 수 없는 수많은 우연의 조각들의 총체를 나로 간주하려는 태도이다. 그런 측면에서 손택의 표현은 마음에 든다. 우발적인 편린들의 총합이 현실인 것처럼, 우발적인 파편들(혹은 타자의 시선들)의 총합이 ‘나’라는 우울한 오브제를 이루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 어떤 대상을 사진으로 찍어보기 전에는 그 대상을 진정으로 봤다고 말할 수 없다
사진은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사진이 재현해 놓은 현실은 그 사진에 충실해지기 위해서 면밀히 검토되고 평가된 현실이다. 1901년, 15년 경력의 아마추어 사진작가이기도 했던 자연주의 문학의 주창자 에밀 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대상을 사진으로 찍어보기 전에는 그 대상을 진정으로 봤다고 말할 수 없다.” 사진은 현실의 단순한 기록이기보다는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 ‘시각의 영웅주의’, 135p
나는 이 말을 다시 비틀어 본다. 사진이라는 매체는 결국 현실을 기록하고 재현하는 다양한 매개 중 하나이므로 ‘사진’이라는 말에 슬쩍 ‘글쓰기’라는 말을 넣어보아도 맥락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어떤 대상을 글로 써보기 전에는 그 대상을 진정으로 탐색해 보았다 할 수 없다. 그 대상은 책일 수도 있고, 주위의 사람일 수도 있고, 사물이나 풍경일 수도 있으며, 어떤 사건 혹은 사안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내느냐, 글로 앉혀내느냐, 혹은 그림으로 표현하느냐 하는 문제는 본질적으로 같은 뿌리에서 비롯된 인간 행위의 양상일 것이다.
습관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를 벌거벗겨낸 사진은 사물을 바라보는 또 다른 습관을 만들어냈다. 강렬하면서도 차분하고,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듯하면서도 초연하며, 별 의미가 없는 사소한 것에 매력을 느낄 뿐만 아니라 부조화에 몰두하는 습관을. 그러나 사진을 통해서 바라보는 행위는 새로운 충격(제재가 준 충격이든 기법이 준 충격이든)에 의해서 끊임없이 새로워졌고, 그에 따라 일상의 시각을 뒤흔드는 [시각적] 인상을 양산해냈다. (151p)
비단 사진뿐일까. ‘보다’라는 동사는 단일한 행위를 설명하는 ‘보편적’ 개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세상에는 하나의 대상을 ‘보는’ 수십 억의 각기 다른 ‘특수한’ 시선이 존재한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새로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이 땅의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런 점에서 카메라, 즉 사진은 이러한 특수한 개개의 시선을 촉진시켜주는 훌륭한 보조 장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글쓰기의 훌륭한 보조 장치는 ‘책’이 되지 않을까.
# 사진이 만들어놓은 무례하고도 신랄한 정체 상태
사진이 지닌 최고의 소명은 인간에게 인간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사진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확인해줄 뿐. (…) 사진의 힘은 우리로 하여금 [사진에 포착된] 어떤 한 순간, 그것도 시간의 정상적 흐름이 곧 제자리에 돌려놓을 순간을 마음껏 검토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은 시간의 고정(사진이 만들어놓은 무례하고도 신랄한 정체 상태)은 새롭고도 훨씬 포괄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을 창출해왔다. (166p)
멋진 표현이다. 사진이 만들어놓은 무례하고도 신랄한 정체 상태. 언젠가 ‘지체(遲滯)’와 ‘정체(停滯)’ 그리고 ‘지연(遲延)’이라는 세 단어를 동시에 떠올린 적이 있다. 부정적 느낌이 아닌, 왠지 애틋하고 서글픈 마음으로. 더디고 막히는 것, 머물러 그치는 것, 더디게 끄는 것. 시간이라는 공통 분모를 깔고 이 세 단어를 인수분해할 수 있는 인수(因數) 격의 요소는 ‘느림’과 ‘연속성’이라는 두 가지 대비되(지만 연결되)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느리지만 계속 나아가는 것. 사진이 주는 ‘시간의 고정’이라는 의미도, 단순히 머물러 그치는 것이 아닌, 나아가는 연속성을 전제로 하는(혹은 연속성을 위한) 일시적 돌아봄(혹은 들여다봄),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라면 지속을 기반으로 하는 우리 삶의 정체(停滯)도 납득할 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
사진을 통해서 바라보는 행위는 파격적이거나 하찮은 제재를 다룰 때에 가장 순수하다는 생각도 등장했다. 즉, 지루하거나 진부하기 때문에 선택되는 피사체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무심하게 대하는 피사체야말로 ‘바라보는’ 카메라의 능력을 가장 잘 돋보이게 해준다. (198p)
무심히 스쳐가는 무수한 대상들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할' 내 안의 카메라(시선과 언어)는 요즘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
# 현실의 흔적을 따라가면 현실을 알 수 있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다루기 힘들고 접근하기 쉽지 않다고 여겨지는 현실을 꽁꽁 가둬두는 방법이자, 꼼짝 않고 그대로 제자리에 있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도 아니면, 사진은 점점 작아지고 텅 비어버리고 사라지기 쉽고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크게 확대해 놓는다. 우리는 현실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이미지를 소유할 수는 있다. 또는 이미지를 통해서 [현실을] 소유할 수는 있다. 프루스트의 말처럼, 현재를 소유할 수는 없으나 과거를 소유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234p)
카메라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경험을 즉각 소급해 바라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현재와 추론적인 관계를 맺는다. 가령 현실의 흔적[과거]을 따라가면 현실을 알 수 있다. (238p)
일상의 시선을 새롭게 가다듬는 데에 좋은 환기가 되는 글이다. 문득 ‘산만함’만큼 새로운 시선에 도움이 되는 것도 없다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산만(散漫). 흩어지고 질펀하다. 현실의 세밀한 흔적들을 채집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덩어리로서의) 시각을 고의적으로 해체하여 여러 곳에 흩뿌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산란(散亂). 단일한 파동이 어떤 물체 혹은 대상과 부딪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 흩어진 시선들이 다양한 사물과 부딪히고 마찰을 일으켜 새로운 시각으로 재편되는 상태를 상상해본다. 이 '산란'의 궁극적 결과물은 '언어화'가 되겠지.
‘시선’에 대한 미진한 생각으로 이 글을 시작했다. 쓰다 보니 ‘산만’과 ‘산란’으로, 그리고 결국 '글쓰기'에 대한 생각으로 마무리되었다. 기-승-전-쓰기. 나의 이 오랜 강박. ‘시선의 산란’ 혹은 ‘산만한 시선’이 나만의 언어로 새롭게 가시화되기를. 찍는 자(카메라)의 고유한 시선(앵글)으로 새롭게 의미화되는 사진처럼. 수전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는 이 산만한 시선에 훌륭한 보조 장치가 되어준 셈이다.
산만할 것. 집중하여 산만할 것. 산문도 흩어질 산문(散文) 아니던가.
(201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