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꿈꾸는 평론 - 느낌의 공동체

신형철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나는 전작주의자가 아니다. 그런데 나로 하여금 저자의 모든 책을 연달아 읽게 만든 당사자가 있다. 소설가도 시인도 아닌 평론가이다. 이 상황이 그저 재미있고 의아할 뿐이다. 그의 첫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2008)로 눈을 떴고, <정확한 사랑의 실험>(2014)으로 몸이 당겨졌다. 그가 ‘첫번째 산문집’이라 주장하는 <느낌의 공동체>(2011)는 다시 문학을 꿈꾸게 해준다.


이 책은 나의 두번째 평론집이 아니라 첫번째 산문집이다. 산문에는 두 종류가 있다. 시가 된 산문과 그냥 산문. 산문시를 꿈꾼 흔적이 없는 산문은 시시하다. 김훈의 <풍경과 상처>나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과 같은 극소수의 책들만이 그 꿈을 이뤘다.


-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책머리에’, 11쪽


결론부터 말하자. 그의 글은 ‘시가 된 산문’에 가깝다. 산문시를 꿈꾸는 평론이랄까. 김훈의 산문에 나지막이 감탄하고, 롤랑 바르트의 글에 순간적으로 감전된 내게, 신형철의 글은, 뭐랄까, ‘시심(詩心)을 품은 논리사유논고’처럼 느껴진다. 다음과 같은 소회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


제목을 ‘느낌의 공동체’라 붙였다. 인간의 세 가지 권능은 사유(thinking), 의지(wanting), 느낌(feeling)이다. 동사 ‘느끼다’에는 ‘서럽거나 감격스러워 울다’라는 뜻이 있다. 어쩌면 사유와 의지는 그런 느낌의 합리화이거나 체계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많을 글들에서 내가 적어내려간 것도 나의 느낌이었을 것이다.


좋은 작품은 내게 와서 내가 결코 되찾을 수 없을 것을 앗아가거나 끝내 돌려줄 수 없을 것을 놓고 갔다. 그 희미한 사태를 문장으로 옮겨보려 했고 이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했다.


- ‘책머리에’, 12쪽


느낌의 공동체,라는 말을 풀어내는 데 다음과 같은 화룡점정은 어떤가.


느낌은 희미하지만 근본적인 것이고 근본적인 만큼 공유하기 어렵다. (…)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줄을 알면서도 그 어떤 공동체를 향해 노를 젓는 일이다. (같은 쪽)


이 책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몇몇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짧은 글들을 추려 묶은 것이다. 시인, 시집, 시사, 소설, 영화 등 6부로 나누어 엮었으니, 거의 10년 전 시선으로 빚어진 책이라고 해야겠다. 시의성이 지난 당시 세론(世論)도 전체적인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 짧은 산문(을 가장한 비평)이어서 문장들은 좀더 도드라져 보인다. 간결하지만 떨쳐 일어나는 힘이 있다. 그의 '경쾌한 단문'이 나를 추동한다.


마침표는 다다익선이다. 많이 찍을수록 경쾌한 단문이 생산된다. 이사크 바벨(Issac Babel)은 이렇게 썼다.

“어떠한 무쇠라 할지라도 제자리에 찍힌 마침표만큼이나 강력한 힘으로 사람의 심장을 관통할 수는 없다."

이 글에서는 서른다섯 번 찍었다.


- 제3부 유산된 시인들의 사회, '구두점에 대한 명상' 255쪽


# 시가 된 산문 - 산문시를 꿈꾸는 평론


1부에서 그가 10명의 시인에 대해 펼친 시선은 (에세이를 가장한) 짧은 작가론처럼 보인다. 그가 언급했듯 ‘시가 된 산문’에 가깝다.


신형철에 의하면 강정 시인은 “죽고 싶다는 욕망과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내전(內戰)을 벌이는 시를 쓰는 사람”(23쪽)이고, 김경주 시인은 “저 자신의 살에서 우주의 기미(幾微)를 엿보고 영혼의 음악을 듣는”(27쪽) 사람이다. 김민정 시인의 시집은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의 시화(詩化)로 읽어도 좋”고(31쪽), 시인 이병률은 “버티고 버텨서 슬픔이 투명해질 때 겨우 쓰는”(44쪽) 사람이다. 시인 강성은의 개성은 “이상한 것에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것에서 이상한 것을 읽어내는 창조적인 괴벽(怪癖)에 있다.”(213쪽)


메타포와 분석이 혼연(渾然)하다. 미학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탁월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 진은영에 대한 글을 보자. 그녀는 철학도였다.


시는 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때 철학의 문으로 나올 수 있고, 철학은 철학의 계단을 더 높이 올라갈 때 시의 문으로 나올 수 있다. 횔덜린의 시와 하이데거의 철학이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단호히 제 길을 갈 때 그 둘은 궁극에서 만난다. 시인 진은영은 시만 생각한다.


(…) 무릇 메타포는 수혈(輸血)이다. 뛰어난 메타포는 감각의 문으로 들어가 사유의 문으로 나온다. 사유를 건너뛴 감각은 가슴만 물들이지만 사유를 관통한 감각은 머리까지 흔든다. 그녀의 좋은 시들이 대개 그러하다.


- 제1부 원한도 신파도 없이, ‘진은영’, 52쪽과 54쪽


시인 문태준에 관한 글은 차라리 아름답다.


서정시는 아름다운 말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을 아름답게 쓰는 것이다. 한 단어를 공용 사전에서 구출해 개인 사전에 등록한다는 것이다.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창비, 2000) 이후 이 말들은 시인 문태준의 인질이 되었다.


(…) 부럽다. 자신의 마음을 ‘뒤란에서 수런거리는’ 것들에게 몽땅 내주는 방심(放心)이 먼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런 것들의 존재를 혼신으로 호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어떤 것들이 단지 ‘있다’는 사실만을 지극하게 기록한다. 깨달음의 발설을 자제하고, 감탄문이나 느낌표를 아낀다. 혹은 그럴 때 아름다워진다. 출석을 부르는 시간만큼은 모든 학생들이 평등해지듯, 그가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다’고 그 존재를 호명해줄 때 만물은 서정적 사해동포주의로 느릿느릿 물든다.


- 제1부 원한도 신파도 없이, ‘문태준’, 37-38쪽


나는 질투를 느낀다. 이토록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쓸 수 있다니. 시인 문태준과 황병승을 비교하며 한국 시의 스펙트럼을 대담하게 언급한 부분도 압권이다.


문태준이 유토피아의 순간적 현현(顯現)을 도모하는 서정의 사도라면, 황병승은 언어의 모험과 정체성의 실험이 같은 것이라고 믿는 전위의 척탄병이다. 전자가 내실을 보살핀다면 후자는 외연을 넓힌다. 이것은 모든 시사(詩史)를 관류하는 두 개의 근원적 기질이다. ‘시’의 이름으로 ‘시 아닌 것’들을 솎아내는 야금술의 길이 있고, ‘시 아닌 것’들을 긁어모아 ‘시’가 될 때까지 밀고 나가는 연금술의 길이 있다. 문과 황은 당대 한국 시의 남북극에 있는 전진 기지다. 둘 사이의 거리가 곧 최근 한국 시의 넓이다.


- 제1부 원한도 신파도 없이, ‘황병승’, 57쪽


비유의 향연이 이 정도라면 그의 글을 ‘산문시를 꿈꾸는 평론’으로 일컬어도 무방할 것이다.


시평이든, 소설론이든, 작가론이든, 세설(世說)이든, 영화평론이든, 그의 글 곳곳에서 문학에 대한 하릴없는 사랑을 찾아보는 것도 살뜰한 일이다. 그에게 문학은 "천박한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에 맞서 숭고한 ‘몰락’의 의미를 사유하는 작업"(186쪽)이다.


문학은 당위를 주장하기보다는 불가피를 고뇌해야 한다고 믿어왔다. 문학은 가장 비겁한 자의 한숨을 내쉬면서 가장 회의적인 자의 속도로 걸어가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문학은 고발하고 규탄하고 공감을 유도하는 기왕의 일 역시 큰 소리로 감당하기는 하되, 공감하지 않으려 애쓰는 내면의 안과 밖을 사려 깊게 분석하고 그 내면을 ‘진짜 눈물’의 세계와 대면할 수 있도록 이끄는 낮은 목소리의 말을 건네기도 해야 할 것이다.


- 간주, ‘소설은 어떻게 걷는가’, 281쪽


# 내면과 문장 - 평론을 문학으로 만드는 10퍼센트의 힘


문학은 문장으로 출발한다. 그는 정확한 문장을 쓰(려 애쓰)는 사람이다. 그러니 문장에 관한 그의 문장을 놓칠 수 없다.


좋은 문장에도 등급이 있다. 좀 좋은 문장을 읽으면 뭔가를 도둑맞은 것 같아 허탈해진다. ‘아이쿠, 내가 하려던 말이 이거였는데.’ 더 좋은 문장을 읽으면 뿌연 안갯속이던 무언가가 돌연 선명해진다. ‘세상을 보는 창 하나가 새로 열린 것 같아요.’ 더 더 좋은 문장을 읽으면 멍해진다. 그런 문장을 읽고 나면 동일한 대상을 달리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그 문장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이런 문장.


(…) 소설가 박상륭 선생은 일찍이 몸과 맘(마음)과 말을 합쳐 ‘뫎’이라는 개념을 창안했다. 몸에서 말로, 말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순차적 개벽이 필요함을 설법하기 위해서였다. 그 논의와 무관한 자리에서 보더라도 몸과 마음과 말은 본래 떨어질 수 없는 덩어리다.


- 제4부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기, ‘마음 공부와 몸 공부의 참고서들’, 292-293쪽


문장. 문장과 짝을 이루는 내면. 이 ‘내면과 문장’은 신형철이 평론가로서 주목하는 10퍼센트의 힘이자 ‘차이’이기도 하다. 문학평론가라는 본업을 가진 자가 문학평론에 관해 논하는 것은 흥미롭다.


영화평론은 영화가 될 수 없고 음악평론은 음악이 될 수 없지만 문학평론은 문학이 될 수 있다. ‘뭔가’에 들러붙어서 바로 그 ‘뭔가’가 되는 유일한 글쓰기다. 이것은 축복받은 특수성 아닌가. 어떻게 하면 문학이 되는가. 글 안에 내면과 문장이 버티고 있어야 한다.


(…) 평론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내면이나 문장 따위가 아니라 통찰과 논리라고 말한다. 맞다. 좋은 글을 만드는 힘의 90퍼센트는 통찰과 논리가 감당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좋은 ‘글’일 뿐이다. 나머지 10퍼센트에 해당하는 것이 내면과 문장이다. 바로 그 10퍼센트가 평론을 ‘글’ 이상의 ‘문학’으로 만든다.


- 제4부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기, ‘문학이 된 평론을 읽는다’, 306-307쪽


나는 여기서 ‘문학이 된 평론’에 대한 신형철의 야심 혹은 희망을 읽는다. 문학이 된 평론의 사례로 문학평론가 정홍수의 첫번째 평론집 <소설의 고독>(창비, 2008)을 들면서, 내면과 문장을 갖춘 평론이 어떤 것인지, 이 책이 어떻게 평론이기 이전에 고급 에세이로 읽히는지 증언하고 있다.


동의한다. 어느 기회에 정홍수 평론가를 만나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선생님의 글에는 '나'가 느껴져서 좋습니다"라고. 그는 조금 멋적어하면서도 자신을 '내면과 문장을 갖춘 평론가'로 언급한 신형철의 글을 기억했다. 글의 비평 감각을 키우고 싶은 내게 황현산 선생과 신형철의 글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이미 그들의 저작을 두루 읽었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생각해보니 이들을 관류하는 공통점은 '문학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내면을 드러내는 문장'이다. 신형철의 평론(혹은 산문) 역시 평론과 문학의 경계에서 문학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릴케의 말 “시는 체험이다”(<말테의 수기>)를 세워놓고 안현미의 시 ‘옥탑방’을 말하며 읊조린 글을 일부 발췌하자면.


그러나 아니지. 중요한 건 체험의 부피가 아니라 전압이지. 무엇이건 더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는 능력. 즉 감전(感電)의 능력. 그래서 생겨나는 언어. 그 언어에 흐르는 전류. 이건 나이와 아무 상관없어. 그 뒤로 20년 정도 더 살기는 했지만 사실상 랭보는 이미 십대 후반에 감전사한 거지. 감전의 천재가 자기 자신에게 타살된 거야.


(…) 시에서 중요한 것은 구술사학이 아니라 전기공학이라는 말씀도,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한번 드려보고 싶었기 때문.


- ‘감전感電의 능력’, 206쪽


이번엔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에 부쳐 언급한 세 가지 종류의 소설에 관하여.


그러고 보니 세 종류의 소설이 있는 것 같다. 희망의 근거를 어설프게 늘어놓는 아마추어의 소설, 어떠한 타협도 없이 절망의 정의로움을 완강하게 고수하는 프로의 소설, 그리고 절망의 끝에서 기어이 희망의 가능성을 설득해내고야 마는 대가의 소설.


- ‘무신론자에게는 희망이 신이다’, 304쪽


“섬세한 필연이 섭정하는 은유(隱喩)의 세계”(266쪽)와 정연한 대구(對句)를 구사하는 수사(修辭)의 세계를 들락거리며, 그는 ‘감전(感電)의 시’를 말하고, ‘대가의 소설’을 이야기하며, ‘문학이 된 평론’을 증언한다. ‘훌륭한 미친 이야기’라는 제목의 5부에서는 영화와 소설을 함께 꾸려 이 둘을 관통하는 사유를 매끄럽게 풀어내는 솜씨를 보여주기도 한다.


정확하고 간결한 문장, 통찰과 논리를 꿰는 창의적 은유, 정교한 대구(對句) 등이 신형철 글의 수사학적 특징이다. 그 사이를 관류하는 핵심이자 (그가 앞서 말했듯) 10퍼센트의 차이를 견인하는 힘은 그의 내면일 테고.


평론은 문학을 품고 있다.


문학을 꿈꾸는 평론. 그의 다음 책이 궁금해지는 이유이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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