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우 소설 <벙어리의 말>에 부쳐
# 1월 1일과 신춘문예
1월 1일이라고 해서 별다른 일은 없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내고 느지막한 저녁 시간 습관처럼 블로그를 열다가 이웃 블로거의 글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L이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 내가 아는 L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나는 블로그를 열어보았고 직감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렇구나. 매년 1월 1일이면 으레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살펴보곤 했었는데. 올해엔 하루가 다 저물도록 잊고 있다가(어쩌면 의도적 무관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의도치 않게 아는 이의 소식을 접하면서 마지못한 듯 하나둘씩 더 찾아보게 된 셈이다. 적극적으로 찾아볼 것도 없이, 몇몇 이웃들이 친절히 (잘 알려지지 않은 지방지 소식들까지) 연달아 올려준 덕분에 나는 K와 H 역시 어느 지방지에 당선자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새해 첫날의 별다른 일이란 이런 소식들에 의아해하는 나 자신을 착잡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시인 C의 최근 시집이 모 단체 선정 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는 것도 뒤늦게 접하게 되었고. 타인의 성과가 내게 미치는 영향은?
생각해본다. L은 자신의 간절함을 철저히 숨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띄게 드러났고 결국 원하던 것을 이루었다. K와 H 역시 작은 성취에 만족하지 않고 좀더 큰 것을 향해 전력을 다했을 것이고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보인다. C는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면서 내게 리뷰와 교정을 부탁했고, 거절할 수 없었던 나는 꼼꼼히 그의 원고를 살피다가, 느리게 진전하는 노력의 양상이 어떻게 차곡차곡 쌓여 가시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새삼 실감했다.
결국 타인의 성공과 실패는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아차 싶은 것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간다. 예컨대, 열망은 재능을 대체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에 반해, 간절한 열망은 어느 정도까지 재능을 견인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이 있더라는 점.
손홍규 소설가가 어느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소설가로서 자신보다 뛰어난 동료 혹은 선후배들이 많았는데, 돌아보니, 가장 오래 써온 사람만이 결국 소설가로 살고 있더라고. 소설가로서의 재능이 가장 뛰어나서가 아니라 가장 오래 열망하고 써왔기 때문에 소설가로 남아 있는 것 같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열망만으로는 혹은 (알량한) 재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 세상 일이 다 그렇겠지만, 결국 '행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것은 '운'일 것이고. 그 '운' 역시 행하고 움직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몫이 아닐까.
L과 K와 H와 C의 작품에 대한 나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오래도록 열망했고 (수단과 방법이 어떻든지 간에) 간절히 행하였을 테니까. 이들의 소식에 의아해하는 나 자신을 착잡히 여기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첫째,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마음이거나, 둘째, 행하지 않는 자신의 게으름을 새삼 확인하는 계기가 되어 불쾌한 마음이거나, 셋째, 문학계(특히 등단에 관한)의 구조적 문제를 인식하고 차갑게 바라보는 냉소적인 마음이거나.
사실 이 글을 시작한 것은 세 번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김원우의 소설 <벙어리의 말>을 짚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 등단 구조 문제를 다각도로 비판(혹은 풍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라면 소설가 장강명이 그의 독특한 르포 스타일 논픽션인 <당선, 합격, 계급>에서 이미 훌륭하게 파고들지 않았던가.
# 벙어리의 말
김원우의 2005년작 <젊은 천사>에 실린 중편 <벙어리의 말>은 대학에서 소설 창작을 가르치는 교수인 화자 '나'의 입을 빌어 문학계의 구조와 세태를 비판하는 소설이다. 생업으로써 소설을 가르치는 ‘나’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의무만 다할 뿐 일정 거리를 유지해오지만, 늦깎이 편입생 허영숙(과 그녀의 습작품)에 대해서는 묘한 관심과 애착을 갖게 된다.
답사기행을 비롯한 몇몇 계기를 통해 허영숙의 작품을 (특별히) 지도하게 되면서 ‘나’는 그녀의 재능을 확신하고 신춘문예에 투고해볼 것을 적극 권하는 것은 물론 그 결과에 노심초사 집착하는 처지에까지 이른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몇 해 전부터 맡기고 있어서 응하는 중앙지 하나와 지방지 하나의 신춘문예 본심 심사 중에도, 닥칠 때마다 이 ‘심사’라는 어휘가 못마땅해서 일본식이기는 할망정 ‘선고’라고 해야 한결 낫지 않을까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그 대상작들의 수준 감별에서 자꾸만 허영숙의 작품들과 비교해대고 있는 내 심사가 얄궂었다. 그러나 읽어갈수록 내 득의가 점점 모양을 갖춰가고 있다는 느낌도 밀물처럼 밀어닥쳤다.
- 김원우, <젊은 천사>, ‘벙어리의 말’, 세계사(2005), 249쪽
김원우 자신이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보니, 소설 속 학교 현장의 핍진성이랄까, (문학 관련) 현실을 비판하는 통렬한 시각이랄까 하는 점들이 매우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그 비판의 대상이 단지 구조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 속에서 분투하는 인물들의 성격에도 세밀히 닿아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예컨대 화자가 허영숙에게 말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
"젊을 때는 누구라도 자기가 온갖 재능을 다 갖고 있다고 착각하다가 마흔 줄에 접어드니 타고난 재능도 없고, 분복대로도 못 한다는 체념이 슬슬 자리를 잡아가더라. 절망이랄 것까지는 없고. 막상 지내놓고 보니 그 체념이 쓰고 달고 시고 해서 재밌더라. 그런 체념은 생활에서나 문학에서나 적당히 순화, 승화의 길을 밟게 되어 있어. 일컬어 팔자다. 팔자는 누구도 모른다는 말은 너무 어정쩡한 언사라서 하기도 싫고, 그 순화, 승화의 길이나 방법이 이 엉터리 사회와 이 덜 떨어진 시대와 불화를 빚었다는 말이 한결 맞을 거야. 물론 어떤 사회, 어떤 시대도 잠정적으로든, 영구적으로든 너무 헐렁하니 모자라고 시시껄렁할 수밖에 없어. 한마디로 천박하고 무잡하지. 인간이나 세상이나 공히 다. 그러니까 별 볼일 없는 인간들도 짝짜꿍질로 평생 떵떵거리며 잘 살지. 문학작품도 정확히 그래서 유치한 사회, 엉망인 시대에 아첨을 떨어댄 것들은 예외적이게도 인구에 회자하고 그래. 아무리 뜯어 읽어봐도 이거다 싶은 구석이 도무지 눈에 안 띄는 범작들이 명작, 걸작, 수작이라는 레테르를 붙이고 한 세기 이상씩 만천하에 유통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 정말 착잡해져.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런 허명에 놀아나는 작품이 너무 많지. 이런 착시현상의 선별적 일반화가 바로 작품의 운명이고 팔자인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면 허무해져서 살기도 싫어지지. 어쨌든 쉽게 말해서 체념의 진정한 육화에는 용기, 집념, 열정 따위가 필요하다는 소리고, 그러면 소위 팔자라는 것이 아양을 떠느라고 아장아장 다가오기도 하는 거야.”
-김원우, <젊은 천사>, ‘벙어리의 말’, 세계사(2005), 240쪽
김원우의 문체는 상당히 독특해서 처음엔 쉽게 읽히지 않는다. 장황하다 싶을 만큼의 장문과 다소 딱딱한 문어체가 뒤섞여 있는 데다가 요즘 소설에서는 거의 접할 수 없는 희귀한(?) 우리말이 쌀밥에 잔뜩 뿌려 놓은 모래알처럼 곳곳에서 서걱거리며 씹히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125쪽가량의 중편인 만큼 분량도 상당하다.)
그러나 인물이 처한 상황이나 심리 상태를 (낯선 단어들로 이루어진) 그 긴 문장 안에서 참으로 찰지고 유려하게 묘파해내는 능력은 단연 주목할 만하다. 작품을 관통하는 냉소적 어조 또한 매력적이고.
실제로도 어린 나이에 천생재주가 상대적으로 돌올한 게 분명하나 추천해주는 책 따위도 건성으로 읽고 나서 그 격조를 웬만큼 알았답시고 아무 데서나 떠벌리는 치들, 아무리 뜯어보아도 무딘 필력임에 틀림없으나 같잖은 시기심과 얄미운 공명심으로 똘똘 뭉쳐져서 오로지 제 잇속만 챙기려고 잔뜩 숙인 머리통부터 한사코 디미는 시건방진 축들, 피상적이나마 여러 방면의 잡다한 글줄을 늘이고 또 그 소양을 바탕으로 온갖 구구한 사연들을 기계처럼 짜맞춰 버릇하는 품 갈망에는 지칠 줄 모르나 그 몸에 밴 얄궂은 지성(至誠)이 결국에는 자기애로서의 보비위질로 비치는 것들, 요컨대 그 어리무던한 일체의 눈치꾸러기들에게 쌀쌀맞다 해도 좋을 정도로 거리를 두어 온 내 처신은 이런 저런 회식 자리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들의 악의 없는 우스개조 흉내내기에도 이미 드러나 있었다. (136쪽)
특히 소설 쓰기(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진솔하게 (물론 시니컬하게) 버무려져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일반 소설론이나 작가의 공식적 의견을 피력한 글이 아닌, 화자의 입을 빌려 마치 술자리나 일반 대화에서 오갈 법한 화법으로 그의 지론이 펼쳐진다는 점이 재미있다. 강의를 들을 때 강사의 개인적인 의견 피력이나 철학, 경험담 같은 것이 훨씬 솔깃하고 영양가 있게 다가오는 것처럼. ‘나’의 입을 빌려 구수하고도 신랄하게 펼쳐지는 생각들을 읽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평소 접하지 못하는 그래서 일종의 걸림돌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낯선 단어들이 오히려 정신을 또렷이 집중하고 읽게끔 만드는, 새로운 언어를 대하는 정신활동의 기분 좋은 피로를 느끼게 하는 역할도 하면서.
수다스런 온갖 문학이론, 또한 문학작품의 여러 소통구조 따위를 아무리 들먹인다 하더라도 글이란 생물학적으로도 혼자서 온몸을 걸레처럼 쥐어짜내 흘리는 순수한 땀방울에 지나지 않으며, 그 결과에 스스로 만족하면 그뿐이다. 자기검열만큼 옳고 바람직한 감별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도 최초의 성실한 독자인 작가는 성에 찰 때까지 뜯어고치면서 고뇌와 희열을 동시에 체험한다. 그 다음의 어떤 보상은 세속계의 진부한 관행이거나 뜬금없는 해프닝일 것이며, 또 다른 측면으로서 작품의 확대 해석을 통한 작가의 거명화 및 작품의 명명화는 일종의 페티시즘 행위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241쪽)
제법 확신하며 기대했던 허영숙의 신춘문예 당선 소식은 들리지 않고, 평소 수준 미달의 문장 감각과 가망 없는 문체, 어설픈 구성으로 합평 시간에 ‘나’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던 강문자라는 학생이 덜컥 지방지의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는 전화를 받게 되는 나. 나는 소위 ‘멘붕’에 빠진다.
그렇긴 해도 여로 모로 하수인 게 틀림없고 그 실적도 보잘것없는 위인에게는 어렵잖게 트이는 그 소위 운길이 특정인에게는 왠지 가뭇없어지는 것 같다는 내 방정이 떠들고 일어서면 맥도 빠지고, 때늦게 그의 재능을 부추긴 내 쪽의 알량한 지인지감과 섣부른 독려가 민망스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136쪽)
도대체 무슨 하자를 물어 그것들을 죄다 불량품으로 퇴짜를 놓았단 말인가? 제목이 너무 싱겁고 안 튀어서? 그건 보기 나름이지. 좀 빽빽한 문장이 껄끄럽게 읽히고, 문청 주제가 시건방지게 단정적 언사나 까발리고 있다고? 그게 개성인데, 또 그런 것까지 까탈을 잡고 뻔한 말잔치나 영일 없이 벌이고 있으니 우리 소설이 지금도 요 모양 요 꼴로 백년하청이지. 야비다리*로서의 나의 그런저런 자문자답이 끝도 없이 이어지다가도 불쑥불쑥 개수작 마라고 고함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을 가누기는 힘들었다. (260쪽)
(*야비다리: 보잘것없는 사람이 제 딴에 잘난 체하는 일시적 교만. 또는 그런 사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가 자신을 벙어리로 규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소 체념적인 그러나 하릴없는 마지막 세 문장.
따라서 말의 주인은 서로가 지키고 누리기로 되어 있는 말값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제도 그 자체이다. 그 제도화된 질서에 순순히 복종하면 이 탁하고 어지러운, 그래서 행운과 불운이 아무렇게나 교차하는 우리의 생활세계가 다소나마 고르게, 또 누구에게나 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나는 뒤적거렸다. 도금이 결국 몸체 거죽에 입히는 장식이고 분식이자 가식일 텐데, 말이나 글에서의 그것들 역할까지 저작해볼 능력이 벙어리에 불과한 내게는 아직 없는 것 같았다. (261쪽)
벙어리의 말,이라는 제목도 의미심장하다. 벙어리,와 말,이라는 서로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단어의 병치. 벙어리의 말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제도화된 질서에 순순히 복종하기 어려운 ‘나’는 차라리 스스로를 벙어리로 호명하면서 자신이 만든 말값을 묵묵히 지키려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벙어리’는 허영숙이라는 인물을 통해 “순진한 짐승처럼” 자기만의 글쓰기에 몰두하는 개인의 잠재성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눈 밝은 문예창작과 교수인 ‘나’에 의해 설(說)을 푸는 재능은 인정받았지만, (등단이라는) 제도권의 인정은 받지 못한, 아직 ‘잠재태’로만 존재하는 소설가. 허영숙은 실패한 걸까?
‘나’가 허영숙에게 건네는 이러저러한 지도의 말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생각을 쫓아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생각을 명료하게 만들어가는 경지를 터득해야겠지. 물론 내 말도 아니고, 자꾸 써보면 알아져, 글이 생각을 불러들인다는 걸.” (161쪽)
글이 생각을 불러들여 자꾸 쓸수록 명료해지는 과정이 어쩌면 벙어리가 말을 내놓는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생각을 쫓느라 급급할 게 아니라, 생각이 떠오르길 기다릴 게 아니라, 도리 없이 쓰고, 쓰면서 생각하고, 그 생각을 다시 쓰는 것. 벙어리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지 않을까.
찾는 사람이 없어 도서관 지하 보존 서고에 벙어리처럼 잠들어 있던 이 책을 빌어 나는 도리 없이 쓰고 쓰면서 생각한다. 등단하지 못한(아니 등단하지 않은), 그래서 실패했다고 느끼는 모든 벙어리들의 말이 각자의 방식으로 명료해지길 바란다는 나름의 야비다리를 치면서.
(2020)
*덧붙여. 최근 김원우 작가의 새 산문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읽었다. 제목은 <편견 예찬>. 작가의 캐릭터가 그대로 드러난다. 기자가 달아놓은 제목에선 웃음이 나온다. '독하지만 매력적인 김원우 산문'. 그 특유의 문체에 기자 역시 당황했으리라. 적응 시간이 필요했을 터. "일사천리로 읽히지만 표면만 스친 듯한 느낌이어서 어딘가 맹물 같은 이 시대 '표준 문장'들과 달리 뭔가 진한 국물, 울창한 수풀, 구성진 판소리 완창을 경험한 느낌이다"라고 썼다. 눈치 보지 않고 할 말은 하는 그의 스타일을 알기에, '최인훈 소설의 허실'을 꼬집었다는 산문이나 요즘 한국 사회의 적폐청산을 비판했다는 글은 꽤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