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그 여자를 아는가?

<비비언 마이어를 찾아서> (feat. 하재연의 시 '이동')

당신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는가? 떨림이나 울음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여자의 보이지 않는 둘레 안에 누군가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을 둥그런 무늬가 일그러지거나 또 다른 고리를 만드는 것을

만약 당신이 선택하는 자라면 옆에 있거나 떠나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 여자를 알고 있었는가?

그 여자는 울거나 웃었거나가 아니라 다른 쪽을 향해 조금씩 움직였다는 것을


- 하재연, <라디오 데이즈>, 문학과지성사, 2006, ‘이동'




하재연의 첫 시집 <라디오 데이즈>를 좋아한다. 최근작인 세 번째 시집 <우주적 안녕>(2019)의 우주적 확장 버전도 흥미롭지만, 내가 시를 읽으며 통과하고 싶은 것은 지적인 자극보다는 어렴풋이 감지되는 어떤 공간 감각인 게 분명하다. 선형적 시간의 흐름을 끊고 툭툭 불거져 나오는 공백의 시를 좋아하는 경향. 단어와 단어 사이, 행과 행 사이의 여백은 중요하다. 단절된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도 점점이 떨어진, 떨어진 듯하면서도 느슨하게 연결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모호한 공간을 적절히 품고 있는 시. 앨리스 먼로의 단편을 좋아했던 이유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이동'이라는 시는 하재연의 등단작 중 하나를 다시 다듬은 것으로 보인다. 원작은 좀더 살이 붙은 모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덜어내고 깎아내고 빼기. 비어 있는 공간으로 읽는 이를 들여놓기.


'이동'을 읽는다. 어떤 여자들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울거나 웃었거나가 아니라 다른 쪽을 향해 조금씩 움직였(다고 생각되)던. 처음 떠오른 이는 '비비언 마이어'. 비비언 마이어의 사진집 <나는 카메라다>와, 그녀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비비언 마이어를 찾아서>도 소환된다.




우리는 그녀를 모른다 : 비비언 마이어

존 말루프라는 남자가 어느 경매에서 그녀의 어마어마한 필름 더미를 찾아내지 않았더라면 비비언 마이어라는 이름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비비언 마이어는 수수께끼에 싸인 인물이다. 남의 집 보모나 가정부로 일하며 생전 엄청난 양의 사진을 찍었던 사람. 프랑스 악센트를 사용하고, 자신의 방 천장까지 신문 더미를 모아 쌓아놓았던 사람. (수집벽의 일환이었을까. 모아두었던 신문들은 대부분 죽음이나 사고를 다룬 어두운 기사 위주였다고 한다.) 외롭고 혼자이고 어두운 면이 있었던 사람. 그녀를 알지만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부분적으로 유추할 뿐. 각자의 입장과 경험을 바탕으로 짐작하는 것일 뿐.


"인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이 가진 단서들을 뽑아내야 해요. 비비안의 사진은 다정함과 인간의 비극에 대한 즉각적인 경계심, 너그러움과 상냥함의 순간들을 보여주죠. 주의 깊고 관찰력이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런 자질들이 있어서 유모였던 게 아닌가 해요."

- 다큐멘터리 영화 <비비언 마이어를 찾아서> 중 포토그래퍼 인터뷰


'아웃사이더 천재 예술가'로 불리기까지

비비언 마이어에 대한 간략하고 압축된 설명은 존 말루프에 의해 출간된 사진집 <비비언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의 책날개에 실린 간단한 소개 글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비비언 마이어는 수십만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2009년 죽는 순간까지 아무에게도 자신의 사진을 공개하지 않았다. 말년의 그녀는 거의 노숙자나 다름없었다. 2007년 15만 장의 필름을 보관해둔 5개의 창고는 임대료를 내지 못해 경매에 부쳐졌고, 사진은 역사가 존 말루프의 손에 들어갔다. 사진이 범상치 않다고 느낀 말루프는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렸고, 놀랍게도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언론 또한 천재적이나 불운했던 이 무명의 사진가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녀의 미스터리한 삶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비비언 마이어를 찾아서>는 수많은 국제 영화제의 수상작으로 뽑혔고, 2015년 오스카상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비비언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는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 중 가장 깊이 있는 작품 235점을 선별해 한 권에 담은 사진집이다. 개인 유품과 기록까지 포함한 방대한 자료집이자 큐레이터 마빈 하이퍼만의 섬세하고 철학적인 관점으로 마이어의 삶을 되짚고 작품을 분석한 비평 에세이기도 하다.

- <비비언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 존 말루프 외, 윌북, 2015


어떤 이유에서든 작품을 공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예술가를 자처하지 않고(자처하더라도 혼자만 아는 내밀한 공간에서 자족적 행위로서의 예술활동을 한다), 남들이 예술행위라고 명명할 만한 '작업'을 놀라운 근기로 지속한다. 꾸준히, 성실하게, 장기적으로. 그리고 매 순간 치열하게.


존 말루프가 비비언 마이어의 사진들을 선별해 출간한 사후 사진집 <비비언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서만 그녀와 접속할 뿐이다.


푼크툼

비비언 마이어의 사진들을 본다. 존 말루프가 그녀의 필름 더미를 탐색하고 선별해 인화한 사진들로 엮은 사진집을 통해서. 그녀가 본 것을 본다. 그녀의 시선으로. 그녀 카메라의 시선으로. 많은 사람들, 많은 전문가들이 그녀의 사진을 감상하고 평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나는 내가 본 그녀의 시선을 더듬어 볼 뿐이다. 단정적으로, 일관된 관점이나 정서로, 그녀의 작품을 꿸 재간이 내겐 없다. 그러나 느낄 수는 있다. 확연히.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다. 순간의 스침을 포착하는 감각. 시간과 공간이 빚어내는 한순간의 '인상'을 담아내는 (타인의) 감각을 나는 느낀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punctum)’ 즉 '찌르는' 무엇을 그녀 사진에서 읽는다. 사물의 패턴, 거울 속 초상, 결정적인 표정, 막 일어난 사건에서. 그것은 사회적, 문화적, 교양적 맥락에서 어렵지 않게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낼 수 있는 ‘스투디움(studium)’과는 다르다.


이런 찌름의 감각은 소위 '감응(affects)'일 것이다. 그녀를 찌른 무언가(쓰레기통 속에 버려진 벌거벗은 인형, 동물의 사체, 살인사건 헤드라인이 달린 신문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담기 좋아했던 성향)가 정확히 무엇인지 진술할 수 없지만, 그 '찌름'을 포착한 결과물(인화된 사진 혹은 밀착된 필름)이 또 다른 방식으로 나를 '찌르는' 것을 느낄 수는 있다. 그녀에게 모종의 스파크/충격/상처의 환기 등을 불러온 '무엇'이 또 다른 형태의 무엇으로 내게 스며든다. 어쩌면 그녀에게 강렬한 '찌름'이었던 것이 내게는 은근하고 모호한 '파장'처럼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사진집에서 본 사진들이 2차 가공을 통해 크롭된 것이 아니라면, 그녀의 미적 감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 속 레이어와 구도만 보더라도 그녀의 예술적 직관과 미감은 주목받을 만한 것이었다. 일상의 소재와 풍경, 어떤 표정이나 어떤 자세, 어떤 구도가 있을 뿐이다. 그녀가 천재인지는 모르겠다. 매일 엄청난 사진을 찍고 신문을 비롯한 다종다양한 사물들을 수집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기이한 습관이 놀라운 지속으로 이어지는 방식을 재능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녀는 타고난 재능을 나름의 방식으로 '홀로' 발현하며 살아간 천재일지도 모른다.



만약, 이라는 질문

다큐멘터리 <비비언 마이어를 찾아서>는 '존 말루프'라는 운이 좋았던 (혹은 운명적으로 비비언 마이어를 발굴해냈던) 사람이 그녀의 감춰진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내용을 골자로 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보는 것 이상의 것을 알 수 없으며, 비비언 삶의 미미한 단서들만 포착할 수 있을 뿐이다. 다큐멘터리는 비비언의 고용주였던 사람들의 인터뷰를 번갈아가며 보여준다. 그중 한 여인은 비비언과 30년 만에 우연히 만났을 때 함께 있어 달라는 비비언의 요청을 거부한 것을 후회한다. 그때 (외로운 비비언 곁에) 잠시 함께 있어주었다면. 한때 고용주였던 또 다른 여인도 말한다. 별나고 괴팍한 구석이 있는 비비언이 불편해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그때 비비언을 내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무엇이 바뀌었을까. 그녀가 자폐적 공간에서 걸어나와 자신의 개인 정보와 사진 작업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개할 확률이 높아졌을까. 그 결과 비비언이 남긴 필름 더미도 그녀 생전에 인화되어 보다 널리 알려질 수 있었을까. 만약 그녀 사진이 생전에 공개되었다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사후에 발견되어 미스터리에 휩싸인 채 엄청난 조명을 받고 있는) 상황이 벌어졌을까. 세간의 이목을 끌고 포토그래퍼로서 주목을 받을 수 있었을까. 결국은 사후의 유명세일 뿐일까. 존 말루프라는 눈 밝고 영리한 젊은이에 의해 알려지고, 많은 언론과 대중에 의해 신화화된 결과일 뿐일까. 만약, 이라는 질문은 공허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묻는다. 그때 그랬더라면,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비비언은 일자리를 잃고 길거리에서 쓰러져 생을 마감한다. 세간의 인정을 구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즐거움과 만족을 위해 사진을 찍었던 사람, 그렇게 함으로써 생을 지속할 수 있었던 사람, 나름의 생존방식을 위해 자발적 고독을 선택했고, 보상받을 수 없는 작업들이 결국 불행으로 이어지고 만 안타까운 삶으로 기억될 사람. 비비언 마이어, 라는 한 여성의 숨겨진 삶을 엿보게 되면서 나는 가오싱젠이 말한 '차가운 문학'을 떠올린다.


차가운 문학, 차가운 예술

가오싱젠은 자신의 미학과 예술론을 담은 책 <창작에 대하여>에서 '차가운 문학'을 언급한 적 있다. 시장의 조류를 좇는 작가의 심미판단을 경계하며, 오늘날과 같은 기호 소비사회일수록 문학은 더욱 차갑고 진지해져야 한다는 요지였다. 그가 7년에 걸친 <영혼의 산> 집필을 마치면서 쓴 (자신의 문학관을 밝히는) 짧은 글의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작가는 혼자 말하는 사람이다. 읽는 쪽이나 쓰는 쪽 모두 문학이 자신들에게 필요해서 읽거나 쓰는 것이므로, 문학은 대중을 비롯한 그 누구에게도 지켜야 할 의무가 없다. 이렇게 문학 본연의 모습을 회복한 문학을 나는 '차가운 문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오늘날의 문학은 소비사회의 상품 중심 가치관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문학은 살아남기 위해 먼저 고독해질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작품을 쓰는 작가들은 대개 세상의 경계에 살면서, 자신의 생전에는 보상받을 수 없는 정신활동을 펼 뿐이었다. 세상의 인정은 구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보람을 위해서, 차가운 문학은 일종의 도망이자, 작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문학이다. 세상의 억압을 떨치고 정신적 자기구원을 추구하는 문학, 민족이라는 이름에 갇히지 않는 비공리적 문학, 작가 자신에게는 불행이 되고 그 민족에게는 비애가 되는 문학.

-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돌베개(2013), 34쪽


비비언 마이어는 '차가운 예술'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의 삶을 헌신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평범하면서도 비범하게.



나는 모든 것을 본다 - 나는 카메라다

비비언 마이어의 사진집 <나는 카메라다> 표지엔 큼지막한 문구가 달린 빨간 띠지가 둘러져 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본다." 비비언 마이어의 사진들을 보면서, 그녀의 삶과 작품을 추적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나는 이 문구가 적확한 카피라인이라는 데 동의한다.


‘나는 카메라다.’
1959년 마이어가 찍은, 뉴욕 어퍼 웨스트사이드에 있는 옛날 영화 상영관 탈리아의 차양에 쓰여 있는 글귀다. 마이어는 이 문구에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담고 싶은 욕망은 마이어만의 것이 아니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투명한 눈동자가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본다.”

- <비비언 마이어: 나는 카메라다>, 윌북, 2015, 마빈 하이퍼만의 에세이 중 28쪽


관심하다

내가 관심을 기울였던 여성 인물들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해본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타인의 각기 다른 기억을 퍼즐 조각처럼 맞춰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한 인간 존재의 진실, 그 불가해성에 대하여. 그 대상이 외롭고 난해한 존재라는 것, 대개 예술가의(혹은 예술가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 종합해보면 '고독하고 불가해한 예술가적 삶'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모종의 동일시 과정에서 생겨난 환상인지도. 결핍의 결핍이 낳은 '결핍을 욕망하는' 심리인지도. 그도 아니라면 지극히 대중적인 관심일지도. 사람들은 불행한 삶을 살다 간 예술가의 삶과 작품에 관심을 갖는 법이다. 생전에 혹은 사후에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탄 경우에는 더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 과정이 드라마틱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열광하기 마련이고.


유명세와 상관없이 그(녀)들을 나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려 애쓴다. “울거나 웃었거나가 아니라 다른 쪽을 향해 조금씩 움직였" 존재들의 방향성을 더듬으며.


이동

울거나 웃었던 시간들에 집착할 게 아니라, 그 시간들이 나를 어디로, 얼마큼, 이동시켜왔는지 궤적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내가 자리한 지점의 좌표를 확인하는 것. 나는 어디쯤 와 있는가? 나는 '나'라는 여자를 알고 있었는가? 그리고,


나는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가?

어디로 이동하려 하는가?


(20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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