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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Oct 28. 2022

아버지와 함께 마지막 춤을

세 번의 계절을 통과하며

정신없는 줄 모르고 정신없이, 힘겨운 줄 모르고 힘겹게,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세 번의 계절을 통과하며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 바다 - 죽음의 토포스


- 난 왜 그렇게 바다가 좋은지 모르겠어.


소파에 힘없이 앉아 있던 아버지가 한 말이다. 6월 6일 현충일. 집에 모시는 동안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가급적 다 해드리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기에 우리는 아버지가 그간 두어 번 이야기한 월미도행을 결심했다. 다들 그다지 내키는 것은 아니었다. 휴일에 월미도라니. 평소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니고, 인천 구석구석 가보지 않은 곳이 없는 아버지에게 월미도가 특별할 리 없었다. 바다가 보고 싶다는 그의 말에 우리는 몇 주 전 영종대교 전망대에서 탁 트인 서쪽 바다를 조망하고 오기도 했다.


단지 '바다가 보고 싶다'는 그의 말에 별다른 이의를 달지 않고 우리는 월미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지는 이번엔 배를 타고 영종도까지 건너갔다 다시 돌아오자고 제안했다. 아들은 영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우리는 아예 배에 차를 싣고 영종도까지 둘러보기로 했다. 힘겹게 부축을 받으며 갑판으로 올라간 아버지는 선상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바다와 갈매기 떼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부루퉁한 상태. 선실 안으로 들어가서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갈매기들의 아우성과 그들이 싸대는 하얀 똥 때문에. 머리를 스치듯 낮게 날아다니는 갈매기 떼들은 히치콕의 영화 <새>를 연상시킬 만큼 모종의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자연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답지 않아. 문명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자연은 불안과 공포의 근원이기도 하다. 바다가 내게 늘 죽음을 연상시켰듯이. 심연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아버지는 왜 바다를 보고 싶어했을까.


- 예전부터 그랬어요? 산보다 바다? 아빠는 산을 좋아했잖아요.

- 바다가 더 좋지. 바다가 좋아.


죽음을 앞두고 죽음의 메타포에 더 가까운 바다에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가. 월미도 앞바다를 건너기 몇 주 전. 우리는 정서진을 찾았다. 강릉의 정동진이 일출의 장소라면 인천의 정서진은 일몰의 장소이다. 인천시의 설명대로 "정동진의 일출이 희망과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면 정서진의 일몰은 낭만, 그리움, 회상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날 서쪽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나는 여러 장의 사진으로 담아두었다. 해가 지는 곳. 바다와 석양. 너무나 명백한 죽음의 토포스. 그 앞에 선 아버지의 앙상한 어깨. 멜랑콜리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나는 바다를 보는 아버지의 시선과, 아버지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동시에 생각했다. 죽어가는 자를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느끼며.


# 바다와 갈매기 - 살아야겠다


침묵 속에서 오래도록 바다와 갈매기 떼들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내게 말했다.


- 살아야겠어.

- 네? (거센 바닷바람과 배의 엔진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 살아야겠다고!

- 갑자기?

- 저것들을 보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 아버지에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 갈매기 떼들을 바라보았다. 소리 없는 아우성은 깃발뿐만이 아니어서. 먹을 것을 구하러 인간들 주변을 치열하게 맴도는 저 생명체도 다르지 않았다.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를 떠올렸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Le vent se lève!... il faut tenter de vivre!


올 초 재출간된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에서 나는 이 시의 다른 구절을 발견했다.


신선한 기운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

나에게 내 혼을 되돌려 준다... 오 엄청난 힘이여!

Une fraîcheur, de la mer exhalée,

Me rend mon âme...  Ô puissance salée !


- 폴 발레리(Paul Valéry), <해변의 묘지(Le cimetière marin)>, 김현 옮김, 민음사, 2022, '해변의 묘지' 중에서  

 

자연(=바다)은 죽음의 공포를 불러오는 동시에 생의 약동을 감지하게 해준다. 자연의 양면성. 바다에 대한 양가감정. 에로스와 타나토스. 나는 그런 것들을 생각한다.


삶에의 의지를 추동하는 것들의 목록을 만든다면 해와 바람은 빠지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바다와 갈매기 떼가 그러한 것처럼, 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다준 것들은 무엇이 있었나.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햇빛에 흐르는 나지막한 새소리. 희미한 새벽 공기의 냄새. 어둑한 저녁에 노랗게 불 켜진 창. 비 온 뒤 풍기는 비릿한 흙냄새. 그런 것들. 당신의 목록엔 어떤 것들이 있나요.


# 이야기가 남다 - 어묵탕과 찹쌀떡


사라져가는 식욕 속에서도 생선은 유일하게 아버지의 입맛을 돋우는 몇 안 되는 음식들 중 하나였다. 나와 동생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생선들을 번갈아가며 상에 올렸다. 고등어, 가자미, 임연수, 연어 등등. 구이나 조림 혹은 찜에 이르는 다양한 레시피가 동원되었다. 같은 음식을 계속 먹다 보면 질리게 마련. 아버지의 구역감 횟수도 서서히 늘어나던 때였다. 생선 관련 음식을 떠올리다 나는 어묵에 생각이 미쳤고, 다음날 아침 어묵탕을 끓여 상에 올렸다. 아버지는 너무나 맛있게 어묵탕을 먹었고, 이 뜻밖의 메뉴는 그의 추억마저 환기시켰다. 프루스트의 홍차와 마들렌처럼.


아침 식사 후 펼쳐진 옛날이야기. 어묵탕으로 소환된 아버지의 과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핸드폰의 녹음 앱을 슬쩍 켜놓았다. 원주 군대 시절, 청량리행 기차, 잠시 멈춘 어느 역 플랫폼에서 팔던 어묵의 맛. 그때의 기억으로 돌아간 아버지는 줄줄이 어릴 적 에피소드들을 이어갔다. 예컨대 이런 것들. 여의도가 무인도였던 시절, 땅콩밭 서리, 마포나루에서 목숨 걸고 한강을 헤엄쳐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상의 모험, 길거리에 펼쳐진 술밥을 슬쩍 집어먹기, 거리 양쪽에 죽 늘어선 새우젓 가게에서 반찬 삼아 새우젓 찍어먹기 등등. 아버지의 어머니(그러니까 나의 친할머니)는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새우젓 가게를 꾸리며 8남매를 키웠다고 한다. 서울 토박이들 중 어느 한 집안의, 별다를 것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는, 진득한, 그런 가족사.


또는 이런 식이었다. 동생이 도전하는 국가 시험을 앞두고 남편이 합격을 기원하며 다양한 맛의 찹쌀떡 세트를 보내왔다. 입맛을 잃은 아버지에게 찹쌀떡은 ‘예전의 맛’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한겨울 밤,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찹쌀떡 장수의 목소리에 대한 기억이라든가, 종로복떡방에서 팔던 전형적인 찹쌀떡을 다시 맛보고 싶은 마음이라든가. 아버지와 나와 동생은 식탁에 둘러앉아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유독 비가 많았던 올 여름, 비가 쏟아지는 날엔 엄마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큰 비로 서울에 물난리가 나던 날,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한 두 연인은 끊긴 전차와 물에 잠긴 길 속에서 발을 동동 굴렀을 것이다. 삐삐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 데이트 약속 시간보다 한참이 지난 저녁 무렵, 아버지는 혹시 몰라 폭우를 뚫고 서울역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때 서울역 대합실에서 여전히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아, 이 여자와 결혼해도 좋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는, 뭐 그런 이야기. 그렇게 두런두런. 때론 끝도 없이.


나는 이야기 속에서 사랑한다. 좋았다고 말하거나 좋은 것에 관해 말하거나. 나는 이야기 속에서 시작한다.


- 김상혁,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문학동네(2016), '나는 이야기 속에서' 일부


김상혁의 시 '나는 이야기 속에서'는 이렇게 끝난다.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의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지낸 4개월 동안 나는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의 기쁨을 찾으려 애를 썼다.


# 죽음을 공부하다 - 죽음학 혹은 생사학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은 죽음을 공부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죽음'을 철학적 사유의 틀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고. 그 시간들을 글쓰기라는 매개를 통해 가시적인 매듭으로 남겨두려 애썼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칸트와 헤겔, 쇼펜하우어와 니체, 하이데거와 레비나스, 들뢰즈와 장자 등, 죽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주축으로 거대한 이름들을 더듬고 되짚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최준식 교수의 죽음학 관련 책이나 강의도 틈틈이 접했다. <죽음학 강의>나 <임종학 강의> 같은 생소한 타이틀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어느 때보다 깊숙이 내 삶 속으로 파고들어온 죽음에 관한 생각들.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점에서, 잘 살고 싶으면 잘 죽어야 하고, 잘 죽고 싶으면 잘 살아야 한다는 평범한 가르침을 전한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 선생의 말은 익숙하다. 그런 점에서 죽음학이라는 말보다는 생사학(生死學)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해 보인다는 최준식 교수의 말은 수긍할 만하다.


<죽음 가이드북>에서 저자가 마지막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이렇다. 우리는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 지금 사는 자신의 삶을 영적으로 고양시킬 수 있다는 것. 이렇게 죽음을 내 삶 안으로 들여와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산다면 삶은 분명 자유롭고 심오해질 것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더 늦기 전에 죽음을 공부하기 바란다는 것.


# 아버지와 함께 마지막 춤을


“목적이 있으면 걷는 게 되고 목적이 없으면 춤이 되는 거라네. 걷는 것은 산문이고 춤추는 것은 시지. 인생을 춤으로 보면 자족할 수 있어. 목적이 자기 안에 있거든. 일상이 수단이 아니고 일상이 목적이 되는 것, 그게 춤이라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고 사는 것이 바로 나에게는 춤이 된다네.”


- 이어령-김지수, <마지막 수업> 중에서


지난 6개월간 나는 아버지와 함께 마지막 춤을 춘 셈이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일상이 목적인 춤. 어느덧 쌓인 뜻밖의 결과물을 돌아보면, 결과적으로 그 춤(글쓰기)은 역설적으로 모종의 수단이 된 것처럼 보인다. '계속하라'는 아버지의 주문을 잊지 않는다면, 나는 당분간 목적 없는 춤을 계속하게 될 것 같다. 글쓰기를 통해.


(2022-4-12 ~ 2022-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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