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는 택시기사를 만나다
남부 지방은 폭염.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지친다. 열차를 타고 오가는 과정 자체가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대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수서역에 도착. 집까지 택시를 탈 것인가, 지하철로 이동할 것인가. 택시를 타는 것에 늘 마뜩잖은 반응을 보이는 빈 때문에 지하철로 이동할까 하다가. 오늘은 택시를 타자. 택시 정류장에 길게 줄서 있는 사람들만큼이나 끝도 없이 이어진 택시 행렬을 바라보며. 부디 '부드럽게 운전하는 기사'와 '쾌적한 실내'라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택시가 걸리기를 바랄 뿐.
순서에 따라 어떤 택시가 우리 앞에 선다. 서울 택시여서 안 가려고 할지도 몰라. XX도 가시나요. 빈이 행선지를 대고 기사에게 묻는다. 딱히 답을 들은 것 같지는 않은데 아마도 고갯짓으로 그렇다고 한 모양이다. 일단 탄다. ㅇㅇ역이라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도 묻지 않고 ㅇㅇ역을 내비게이션에 찍는 그를 보고 빈이 정확한 지명을 알려준다. 그가 묵묵히 주소를 찍는다. 말수가 적은 사람. 라디오도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조용한 실내. 앞좌석 등받이에 붙여놓은 종이가 눈에 들어온다. 문짝에 있는 시집은 그냥 가져가도 된다는 문구.
자동으로 문짝에 시선이 간다. 얇은 시집 두 권이 꽂혀 있다. 역시 자동적으로 집어든다. 후르륵 넘기지 않고 한 페이지씩 넘겨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들리게 한다. 누군가 당신의 시집을 읽고 있어요,라는 기척을 내려는 듯.
떠오르는 것 두 가지. 아무래도. 시를 쓰는 버스 기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짐 자무쉬 감독의 <패터슨>. 그리고 실제 트럭 기사이면서 시 수업을 듣기 위해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1주일에 두어 번을 오갔다는 어느 시인의 에피소드. 나는 그 에피소드를 S로부터 들었고. S가 건네는 (트럭 기사-시인의) 첫 시집을 얼결에 받아두었다.
영화 <패터슨>에서 주인공 패터슨의 시를 읽는 이는 (아내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다.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바라거나, 시인이 되거나, 시집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패터슨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단어들을 시(처럼 보이는 형식으)로 수렴하는 과정을 매일 반복할 뿐이다. '수행과 과정으로서의 시쓰기'를 이토록 잘 보여준 영화가 있었나.
S로 인해 알게 된 트럭 기사-시인의 이름은 이제 기억할 수 없다. 그때 무심히 받아든 첫 시집의 제목도 기억할 수 없다. 내가 그 시집을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도 기억할 수 없다. 다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강요하지 않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시쓰기를 위해 (남들이 보기에 유난하다 싶을 만큼)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누군가의 '의지'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는 것.
자발적 노고. 예술가의 행위는 이 자발적 노고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 내적 동기와 자기 촉발의 순간. 그리고 그 '점화'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불씨가 사라지기 전 어떻게든 말과 이미지로 붙잡아두려는 어떤 몸짓. 몸짓의 주체가 말이나 이미지를 부리는 자인지, 말이나 이미지 자체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언가가 일어날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매개로/도구로 내어주는 것. 예술가의 몸은 그런 것일 텐데.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자기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 누구로서의) 우리는 단지 서로의 '자발적 노고'를 존중할 수밖에. 때로는 지켜보고 때로는 응원이나 지지의 제스처를 취할 수밖에.
택시 정류장이 아닌/버스정류장에서 손님을 태운 죄로/충직스러운 공무원의 카메라에 잡혔다/죄목은 버스정류장 질서 문란으로/이십 만 원의 과징금 대상자이다/궁색한 변명을 하고/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어/절반인 십만 원만 부과받았다//택시요금 오천 원을 받았으니/부당이익금의 이십 배를 환급한 셈이고/이십만 원의 과징금을 뚝 잘라/절반만 내게 되었으니 횡재를 하였다/십만 원만 고이 바치면 되니까/십만 원을 번 것이다/코로나 시대에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나는 행운아, 부자가 되었다
- 이하재, '가난한 셈법' 전문, <눈물로 피운 꽃을 사랑하랴>, 인문학사, 2023
이하재,라는 필명으로 시집을 낸 말없는 택시 기사 이재하,의 시집을 나는 말없이 가방 속에 집어넣는다. 유명 시인의 시집도 팔리지 않는 시대에, 무명 시인의 시집을 조용히 챙겨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싶었던 걸까. '건필하세요'와 같은 흔한 인사 대신 아무도 읽지 않을(수도 있는) 자신의 시집을 누군가 소리 없이 가져갔다는 표시. 그런 소박한 존중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패터슨이 버스를 운전하는 틈틈이 쓴 시의 완성도에 대해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택시 기사 이재하 혹은 시인 이하재의 시에 대해 (소위 말하는) '미학적 완결성'과 같은 잣대를 들이대어 말하고 싶지 않다. 나의 시선을 잡아끌거나 거듭 펼쳐 읽고 싶은 시편이 눈에 띈 것도 아니지만. 다만.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 이 세 가지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시쓰기를 선택한(혹은 받아들인) 자에 대한 모종의 공감 같은 것. 그 선택과 수용의 결과물을 소박하게 추려 스스로 기념하는 것에 대한 애틋한 마음 같은 것.
시인의 이력을 읽고 나서 다시 생각한다. 각자의 사연, 각자의 사정. 각자의 슬픔과 각자의 이야기가 시가 되려 할 때. 혹은 다른 무언가가 되려 할 때. 그 '무엇'에서 우리는 다시 우리의 이야기를 꺼낸다. 혹은 꺼내볼 용기를 품기도 한다.
문득 그의 차 키 홀더에 적힌 문장을 발견한다. "시인을 시를 쓴다."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음악을 만들면 된다.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 '만들어진 무엇'을 만날 수는 있다. 느끼거나 생각해볼 수 있다. 그 느낌과 생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 선순환.
생각은 최근의 두 이슈로 이어진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고(故) 김민기에 대한 것. 빔 벤더스의 최근 영화 <퍼펙트데이즈>에 대한 것. 공통점이 있다면. 일상과 사소한 것으로부터 '예술적 순간'을 만들어내는 겸허한 감각이다.
거창한 것과 거창하지 않은 것. 평범한 것과 평범하지 않은 것. 거창한 것은 사소한 것들의 연쇄가 만들어낸 결과의 한 측면일 수 있고. 비범한 것은 평범한 것들의 축적이 가져온 질적 변환의 한 상태일 수도 있다는. 뭐 그런 생각.
버스를 몰며 틈틈이 시를 쓰는 버스기사-시인 패터슨은 평생 환자를 돌보며 시를 쓴 의사-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삶과 겹쳐진다. (짐 자무쉬는 미국 뉴저지의 소도시 패터슨을 방문한 후 영감을 받아 영화 <패터슨>을 만들었다.) 윌리엄스의 시집들에서 선별한 시들을 엮어 <패터슨>이라는 제목의 초역본으로 펴낸 역자 정은귀 교수는 옮긴이의 말에서 다음과 같은 윌리엄스의 말을 전한다.
사람들이 어떻게 일을 하면서 시를 쓰냐고 묻자, 윌리엄스는 "어렵지 않아. 둘은 다른 각각이 아니라 하나의 두 부분이지. 둘은 서로를 보완해. 한쪽이 나를 지치게 하면 다른 한쪽이 나를 쉬게 하지"라고 말했다.
(...) 또 자기가 지도하던 학생에게 들려준 이런 고백도 있다.
"회진 돌면서 혹은 가정 방문 진찰을 하면서 정말 많이 배워. 그런데 가끔은 내가 도둑이 된 것만 같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사람들을, 장소들을 보니까. 또 그걸 내 글에다 써먹으니까 말이야. (...) 거긴 더 깊은 무언가가 분명 흐르고 있어. 모든 만남이 주는 힘 같은 것 말이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패터슨>, 정은귀 옮김, 민음사, 2021, '작품에 대하여' 중에서
"모든 만남이 주는 힘" 같은 것.
역 앞 택시 정류장에서 대기하는 수많은 택시들 중 시를 쓰는 기사가 운전하는 택시를 만난 것. 그런 만남이 촉발한 파편들을 얼기설기 엮어 보는 것. 이 글을 시작하게 된 것은, 몇 년 전 사둔 시집 <패터슨>을 다시 펼치게 만든 것은. 그런 종류의 힘이었다.
To make a start,
out of particulars
and make them general, rolling
up the sum, by defective means -
-Paterson (From Book One)
(2024-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