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화서(無限花序)와 같은 삶 (feat. 이성복의 <무한화서>)
한국에 돌아와 1년 정도 시 공부를 했다.
시를 공부한다는 게 뭘까. 삶을 '정성껏' 사는 것 자체가 공부라 할 수 있다면, 시를 '정성껏' 읽고 느끼고 써보는 과정 자체가 공부일 텐데. 그 어떤 별도의 공부가 필요하단 걸까.
삶의 기술(기예)을 배우듯 시의 기술을 익히는 것. 시론을 읽고 시 작법을 공부하는 것, 타인의 시를 감상하고 평가해보는 것, 무엇보다 많은 시를 읽고 써보는 것, 내가 쓴 시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견디고 수용하는 것. 1년간의 공부는 이렇듯 제도화된 프레임 속에서 이루어졌다. 제도화된 시작(詩作)에 거부감을 갖고 있던 내가, 제도화된 시작의 세계를 들여다봄으로써만 이해하고 시작(始作)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모든 일이 그렇듯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다. 얻은 것은 세 가지.
1) 시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무엇이 시가 아닌지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는 것.
2)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지만 누구나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3) 좋은 시는 쓰지 못해도 어떤 시가 좋은 시가 아닌지는 얼추 짚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 또한 주관적인 관점에 불과하겠지만)
아! 무엇보다 예술 전반에 걸쳐 ‘시’가 차지하는 위치는 그 모든 분야를 잇는 어떤 ‘정신’ 같은 것, 보이지 않는 ‘근간’ 혹은 ‘기원’에 가깝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 저 너머를 향해 취하는 공통의 자세 같은 것이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
잃은 것은?
1) 지난 몇 년간 결과보다는 ‘과정’으로서의 시 쓰기에서 즐거움을 찾아왔는데, 더 이상 ‘과정’만으로는 이 ‘즐김’을 추동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2)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 시,라고 생각했기에 말할 수 없음에도 말하려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했던 나의 순진한 (‘가능세계’에 대한) 열망이 ‘현실세계’와 충돌하며 가차없이 쪼그라든 것. (이제와 생각해보면 이것은 ‘얻은 것’일 수도 있다. 현/실/인/식,이라는.)
3)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침묵을 의도한다는 것. 시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그간의 자각에도 불구하고, ‘말하려는 시도’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는 것. 안으로 쌓여가는 말이 바깥으로 배설(排說)되지 않는다는 것.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잃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결국 얻은 것이기도 하니, 특정 기간을 톺아본다는 것은 이처럼 정밀하게 득실을 따질 만한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시에 관한 여러 가지 책과 글을 접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음은 확실하다. 관념적이고 학구적인 글,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글, 어렵고 현학적인 글, 쉽고 재미있는 글 등등. ‘시론’ 혹은 ‘시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책들은 대개 엇비슷한 내용이나 형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중 나를 사로잡는 몇 권의 책이 있었다. 이수명 시인의 <횡단>과 <표면의 시학>, 권혁웅 시인의 <시론> 같은 책들이다.
독특한 것으로는 단연 이성복 시인의 시론집이었다. ‘무한화서’, ‘극지의 시’, ‘불화하는 말들’ 이렇게 세 권으로 이루어진 시리즈 중 가장 강렬했던 것은 <무한화서>. 밑줄도 모자라 무수한 포스트잇을 붙일 수밖에 없었던 책. 시간이 흐르고 다시금 이 책을 꺼내 보는 나의 한 줄 평은 이렇다.
“이토록 시적(詩的)인 시론집이라니!”
시인이 자서(自序)에서 밝혔듯 2002년에서 2015년까지 대학원 시 창작 강좌 수업 내용을 아포리즘 형식으로 정리한 이 책은 시론집이라고는 하지만 글쓰기에 관한 잠언집이라 해도 무방하다는 생각. 아니, 더 나아가 ‘삶과 예술에 관한 작가의 말’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크게 다섯 개로 나뉜 구획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이 달렸다. ‘언어’, ‘대상’, ‘시’, ‘시작(詩作)’ 그리고 ‘삶’.
470개로 이루어진 말들 중 처음과 끄트머리에 실린 두 개만 인용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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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花序)'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을 가리켜요. 순우리말로 '꽃차례'라 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성장이 제한된 '유한화서'는 위에서 아래로, 속에서 밖으로 피는 것이고(원심성), 성장에 제한이 없는 '무한화서'는 밑에서 위로, 밖에서 속으로 피는 것이에요(구심성).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는 '무한화서'가 아닐까 해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니까요.
- 이성복, <무한화서>, 문학과지성사, ‘언어’ 중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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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경계로 이쪽과 저쪽이 생기는데, 저쪽으로 가려고 창문을 부수면 저쪽도 없어져요. 아무리 가까워도 끝내 닿을 수 없는 것, 그것을 생각하면서 아직 설렘이 있다는 것, 그것을 저버리고 그냥 이 자리에 주저앉지는 않겠다는 것, 시적(詩的)으로 산다는 건 그런 것 아닐까 해요.
- 같은 책, ‘삶’ 중 173쪽
그간 내가 얻은(얻었다고 생각한) 것과 잃은(잃었다고 생각한) 것이 하나로 수렴된다.
무한화서와 같은 삶.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을 과정으로 즐기는 것.
그렇게 시적으로 사는 것.
삶이 예술이 되는 기예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2020)
또 하나의 글을 실패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