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듬 -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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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도 헌정하지 않는 노래가 좋았다
누구를 위해 그리지 않는 그림이 좋았다
나는 네 사진을 세워두고 미완성의 자전적 장시를 쓰지 않는다
서로를 돌보지만 바치지는 않는 삶에 관하여 생각한다
너는 새알을 가지고 왔다
아무도 가지 않는 음침한 해변에서 주운 거라고 했다
가슴이 품은 한없는 슬픔처럼 작은 알이었다
나는 그 알에서 태어날 바다의 언어를 해독하고 싶다
실잠자리가 건드린 물결처럼 커다랗게 일렁이는 마음으로
달이 움직이는 동안
둥글고 환하던 빛이 사라지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의심했다
혀끝으로 대보는 봉합한 잇몸처럼
우리 사이에 알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아무에게도 헌정하지 않는 노래가 좋았다
서로를 돌보지만 바치지는 않는 삶에 관하여 생각한다
하지만
너는 환기구를 찾고 나는 창문이 필요해
(하략)
- 김이듬,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잘 표현되지 않은 불행' 중에서, 56-57쪽
잘 표현되지 않은 불행,이라니! 시인은 황현산 선생의 비평집 <잘 표현된 불행>을 염두에 둔 것 아닌가. 제목이 나를 끌어당기고, 시의 앞부분이 나를 끌어 앉힌다. 김이듬 시인의 최근 시집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중에서 눈에 띈 시이다. 첫 5연을 반복해서 읽는다. 김이듬의 시 같지 않다. (시인 당사자는 불쾌해할지도 모르겠으나)
아무에게도 헌정하지 않는 노래, 누구를 위해 그리지 않는 그림, 서로를 돌보지만 바치지는 않는 삶! 누구를 위해 혹은 무엇을 위해, 특정 목적에 바쳐지는 예술(삶을 포함한) 행위를 이토록 부드럽게 거부하는 방식은 김이듬 스타일이 아니다. (그녀의 강렬한 이전 시집들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저마다의 슬픈 새알에서, 실잠자리가 건드린 작은 물결에서, (바다의 언어로 대변되는) 저 너머의 커다란 의미를 읽고 싶었던 시적 화자는 시간의 물결 속에서 의심하고 잊어왔던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선택하는 것. 홀로 있는 방식을 위해 시(혹은 글쓰기)를 선택하는 삶. (그 누구 혹은 무엇도 아닌) 나를 위한 방식으로써의 시(혹은 글) 쓰기.
이것을 깨닫는 데에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낸 나로서는, 그간 살과 피, 날 선 육체의 감각, 성적 관능을 드러내왔던 시인 김이듬의 변모가 퍽 인상적이다. 혹자는 너무 힘이 빠진 것 아니냐고 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정 부분 아방가르드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시의 특성상 더 새롭고 더 파격적인 무엇을 지향하는 젊은 시인 혹은 평론가들이 흔히 지적할 수 있는 종류의 평 말이다.
그러나, 힘이 빠진 게 아니라, 힘을 뺀 것이라면? 시인의 힘이 빠졌는지 시인이 힘을 뺐는지 따지고 싶지는 않다. 단지 전위의 첨단에 서 있던 시인이 일상 속 시선을 발견하는 (어쩌면 돌아오는) 과정이 어딘가 모르게 묘한 수긍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나 할까.
“너는 환기구를 찾고 나는 창문이 필요해”
이 구절은 또 어떠한가. 서로를 돌보지만 우린 서로에게 타인일 수밖에 없다. 함께 숨 쉬지만 우린 각자의 미세한 결(생각 또는 욕망) 때문에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모두 환기가 필요하고 출구가 필요하다. 바깥으로 향할 수 있는, 적어도 얼굴 내밀어 햇볕과 바람을 쐴 수 있는, 그런 통로 말이다.
‘너의 환기구와 나의 창문’ 모두를 존중한다는(서로를 돌본다는) 미명 아래 온통 환기구와 창문으로 구멍 뚫린 공간이 만들어진다면 이것이야말로 ‘잘 표현되지 않은 불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리고 이러한 표현되지 않은 불행을 ‘홀로 있는 방식’으로 기어이 표현하고야 마는 시인이 있어 우린 ‘잘 표현된 불행’을 읽고 느낄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일찍이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감각에 눈이 밝았던 평론가 황현산 선생은 그녀의 첫 시집 <별 모양의 얼룩>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지막 부분을 옮긴다.
“(중략)…(이것은) 김이듬에게서 자주 시쓰기에 비유되는 섹스의 체험과도 같다. 시쓰기의 다른 이름인 섹스는, 쿤데라가 어디선가 말했던 것처럼, 육체가 속죄하는 순간에 해당한다. 그러나 쿤데라에게서 이 속죄는 무겁고 늙어가는 육체의 그것이지만, 김이듬의 속죄는 공복감밖에 가진 것이 없는 허기진 육체의 그것이다. 한쪽은 제 육체를 버리는 것으로 끝나지만, 다른 한쪽은 제 육체가 이제부터 형성되기를 내내 기다려야 한다. 시의 감수성은 잘 살아가는 사람의 감수성이 아니라, 늘 지워졌다가 다시 회복되는 사람의 감수성이다. 김이듬의 시적 운명도 재능도 거기 있다.”
- 황현산, <잘 표현된 불행>, ‘김이듬의 감성 지도’, 난다, 606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의 감수성을 김이듬에게서 새삼 읽는다.
공복감으로 허기진 육체는 여전한 채로.
(2019.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