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다 무엇을 살다 간 계절일까

권대웅 시집 -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대만에 있을 때 권대웅 시인의 신간 소식을 접했다.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그가 14년 만에 펴낸 시집의 제목이다.
20대 중후반 무렵 어느 편집디자인 회사의 작업실에서 마주치곤 했던 그의 이미지가 옅은 구름처럼 스쳐갔다.
한국에 들어가면 사와야겠다고 생각한 게 2017년 여름인데, 1년 뒤 한국으로 돌아와 이 시집을 읽게 되었으니, 여름에서 여름으로 이어진 시집 읽기인 셈이다.

14년 만에 내는 시집인데 140년처럼 먼 것 같다.
140년 전에 나는 어느 여름을 살았고
140년 후에는 또 어느 시냇물이나 구름,
혹은 바람 같은 것으로 흐르고 있을까.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여름의 눈사람들.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들.

가을밤 하늘에 보이지 않는 소 한 마리가
달을 끌고 간다.

(2017년 그해 여름)

- 권대웅,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문학동네, '시인의 말'

머리말 역할을 하는 이 '시인의 말'에 시집을 끌고가는 주요 화두가 있는 듯 없는 듯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가 달을 끌고 간다
느릿느릿 쟁기 하나로
어두운 저 무한천공(無限天空)을 갈고 있다
걸음이 무거워져 뒤를 돌아볼 때마다
달이 자라나고 있다
꿈뻑거리는 눈동자가 안쓰러워
훠이훠이 소몰이꾼처럼
새들의 울음이 밀어주고 가는
하늘에 달이 차오를수록
소의 등에 앉은 구름이 가볍다
커질수록 환해져야 한다는 것
둥글어질수록 가벼워져야 한다는 것을
달을 끌고 가는 보이지 않는 소가
저 어둠 속에서 말해주고 있다

(같은 책, '달소' 전문)

느릿느릿 저 어두운 무한천공을 갈고 있는 '소'의 자리에 나는 자꾸 '시간'을 포개어 읽는다. 20년 전 권대웅 시인의 얼굴이 가물가물하다. 다만 환한 소처럼 둥글둥글하던 웃음이 늘 그의 얼굴에 머물렀던 것은 기억한다. 그는 내 이름조차 잊었을 것이다. 문득 먼 과거의 어느 순간이 화들짝 현재로 밀려올 때, 그 아련한 시간의 기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난감할 때가 있다.


길모퉁이를 돌아서려고 하는 순간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려고 하는 순간
햇빛에 꽃잎이 열리려고 하는 순간
기억날 때가 있다

어딘가 두고 온 생이 있다는 것
하늘 언덕에 쪼그리고 앉아
당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당신과 살던 집' 중에서 )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그는 무수히 많은 시간과 기억의 갈피들을 접고 또 펼쳤을 것이다.


기억과 공간의 갈피가 접혔다 펴지는 순간
그 속에 살던 썰물 같은 당신의 숨소리가
나를 끌어당기는 순간

('당신과 살던 집' 중에서)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를 스쳐간 무수한 인연들은 어떻게 멈춘 듯 지나가고 또 소리 없이 자라나 어느 날 불쑥 우리 앞에 서는가.

문득 돌쩌귀를 들추었을 때
거기 살아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지나간 모든 것들은 멈춘 것이 아니라
남겨진 그 자리에서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기억의 갈피갈피 햇빛이 지나갈 때
남겨진 삶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기억의 갈피로 햇빛이 지나갈 때' 중에서)

사라진 듯 정박해 있는 모든 것들은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다.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니다. 칠 년 만에 땅 속에서 나와 7일만 살면서 오직 사랑을 찾기 위해 울던 매미. 당신은 그토록 간절하던 당신을 만났는가.
등줄기에 후줄근하게 땀이 흘렀다. 나도 녹아가고 있었다. 여름의 눈사람처럼 있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 백일홍을 심었는데 백일홍도 그만 져버리고 말았다.

출근하는데 죽은 매미가 마당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화무십일홍' 중에서)


이번 시집에서 익숙한 부사들을 발견한다. 평소 내가 글에서 사용하는, 가급적 부사를 쓰지 않으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자주 출몰하는 그런 부사들. 화들짝, 황급히, 아득히, 와락, 문득, 불현듯, 순간, 멍하니, 까마득하게, 불쑥, 기우뚱, 우두커니, 물끄러미, 홀연히 등등. (물론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부사는 '하릴없이'이지만.)

정(靜)과 동(動)의 부사들이 교차되며 뜻밖의 삶의 장면을 포착하는 다음의 시는 시집의 마지막에 놓이면서 시집 첫머리에 놓인 '시인의 말'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주부와 술부처럼.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

지나간 그 겨울을 우두커니라고 불렀다
견뎠던 모든 것을 멍하니라고 불렀다
희끗희끗 눈발이 어린 망아지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미움에도 연민이 있는 것일까
떠나가는 길 저쪽을 물끄러미라고 불렀다

사랑도 너무 추우면
아무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표백된 빨래처럼 하얗게 눈이 부시고
펄렁거리고 기우뚱거릴 뿐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봄 햇빛 한줌

나무에 피어나는 꽃을 문득이라 불렀다
그 곁을 지나가는 바람을 정처 없이라 불렀다
떠나가고 돌아오며 존재하는 것들을
다시 이름 붙이고 싶을 때가 있다
홀연 흰 목련이 피고
화들짝 개나리들이 핀다
이 세상이 너무 오래되었나보다
당신이 기억나려다가 사라진다

언덕에서 중얼거리며 아지랑이가 걸어나온다
땅속에 잠든 그 누군가 읽는 사연인가
그 문장을 읽는 들판
버려진 풀잎 사이에서 나비가 태어나고 있었다
하늘 허공 한쪽이 스르륵 풀섶으로 쓰러져내렸다
주르륵 눈물이 났다
내가 이 세상에 왔음을 와락이라고 불렀다

꽃 속으로 들어가 잠이 든 꿈
꽃잎 겹겹이 담긴 과거 현재 미래
그 길고 긴 영원마저도
이생은 찰나라고 부르는가
먼 구름 아래 서성이는 빗방울처럼
지금 나는 어느 과거의 길거리를 떠돌며
또다시 바뀐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 전문)


문득, 그의 안부가, 그리고 먼 시간 한 켠을 함께 공유했던 그때 그 공간 속 사람들의 안부가 몹시 궁금해졌다.

그들은 다 무엇을 살다 간 계절일까.

(2018년 여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