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의 있음을 붙드는, 그리고 돌연히 지속하는

페터 한트케 - <시 없는 삶>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나 <관객모독> 그리고 <소망없는 불행>으로만 알고 있던 페터 한트케. 그의 이름과 시를 연결지어 생각해본 적이 없기에 이 시집이 궁금했다. 제목마저 <시 없는 삶>.


Peter Handke

2019년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평을 받았다.


“독창적인 언어로 인간 경험의 주변부와 그 특수성을 탐구한 영향력 있는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다.”

- 스웨덴 한림원, 2019년 노벨 문학상 심사평 중에서


인간 경험의 주변부와 그 특수성,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영어로는 이렇다.

"the periphery and the specificity of human experience".


이 말 역시 직관으로 붙들 만하지 않은가. 이 시집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밤이 다 갈 때까지

얼마나 많은 건물 사이 골짜기가 소요되는가?


빵 만드는 사람, 요제프 메르츠가 죽는다.

제빵장인 요제프 메르츠 씨가 죽었다.


한 복서에게 카운트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창문을 닫을 수 있나?


몸으로 알아보려고

나는 복도로 나선다.

나는 복도로 난 문을 연다

복도에서 방으로 난 문을 닫고

복도에서 방의 문을 연 다음

방에서 복도로 난 문을 닫는다.

내가

몸으로 알아보려고

복도로 나서는 동안에

나서는 동안만큼 나는

복도로 나서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되었다.


몸으로 알아보려고

구두끈 매듭으로부터 올려다본다.

나는 빨래집게가 잔뜩 달린 줄을 바라본다.

몇 개의 빨래집게 구간만큼 나는 빨래집게가 잔뜩 달린 줄을 바라본다.

구두끈 매듭만큼 동안에 빨래집게를 바라본다.

몇 개의 빨래집게만큼 동안에

나는 구두끈을 묶는다.


(중략)


몸으로 알아보려고

나는 케이크 한 조각을 먹는다.

케이크 먹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케이크 먹는 일을 본다.

케이크를 먹는 생각만큼

나는 케이크를 먹는다.

하지만 케이크가 넘어지는 동안만큼

(내가 케이크 먹기를 보는 일 없이

케이크 먹기를 생각한 다음)

나는 쓰러지는 뚱뚱한 제빵사를 생각해야 한다.

제빵사가 쓰러지는 걸 생각하는 동안만큼

나는 케이크 먹기를 중단한다.

제빵사가 쓰러지는 만큼

나는 케이크를 먹지 않고 있다.

제빵사가 천천히 쓰러지는 동안

케이크가 쓰러진다.

접시 위에서

천천히 뒤쪽으로.


- 페터 한트케, <시 없는 삶>, 1부 "내부세계의 외부세계의 내부세계" 중

'31. 시간단위, 시공간, 현지시간', 127~129쪽




왠지 이 시에 끌린다. '몸으로 알아보려고'라는 말의 반복에 멈춘다.


의식에 대한 의식. 사물을 바라보는 의식, 그 의식을 바라보는 또 다른 의식. 사물에 대한 의식의 지평만큼만 의식할 수 있는 몸(성)의 한계. 그 한계의 가시화를 끝까지 밀고 나가보려는 실험.


그 실험은 시간(사건)을 분절하고 시공간을 겹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렇게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흐름. 끊을 수 없는 시간을 끊어보려 하지만 빨래집게 구간만큼 나누어질 수는 없는(혹은 나누어진다고 착각하는) 시간의 지속이 마치 영화 속 슬로우 모션처럼 지나가는 듯하다. 잘게 쪼갠 두 개의 장면을 교차편집 해놓은 듯한 느낌이랄까.


쪼갬, 동시성, 중첩, 이런 단어들이 머리 속을 스쳐간다. 그리고 '지속'이라는 단어로 수렴된다. (나는 마침 베르그손의 '지속' 개념에 몰두해 있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 '지속'이 주는 이미지를 시로 옮기는 것에 관한 가능성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후에 나오는 '지속의 시'를 보고 화들짝 놀랄 수밖에. 40쪽에 이르는 이 긴 시의 마지막은 (역시 놀랍게도, 아니 놀라울 것도 없이) 앙리 베르그손의 말로 끝난다. '지속의 시' 마지막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오래전부터 난 지속에 관해 써볼 생각이었지.

논문이나 희곡이 아니고, 소설도 말고 -

지속은 시가 되려는 것.

한 편의 시로 물음을 던지고

한 편의 시로 기억을 더듬어,

지속이란 무엇인지

한 편의 시로 주장하고 보여주려 한다. (중략)


지속이라는 것, 그것은 무엇이었나?

지속은 시공간인가?

잴 수 있는 것? 명징함일까?

아니, 지속은 하나의 감정,

가장 쉽게 휘발되고 마는 감정, (중략)


지속에 힘입어

하루살이 존재인 나는

앞서간 이들과 뒤에 올 이들을 내 어깨에 싣는다. (중략)


돌연한 지속,

이미 그것은 스스로 한 편의 시를 말한다. (중략)


내게 결여되었던 건

바로 지속의 자극,

지속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살아본 것도 아니다. (중략)


더는 아이가 아닌

어쩌면 이미 노인일 수도 있는

아이에게서

아이의 눈을 다시 발견할 때

다가오는 그것이 지속이다. (중략)


불확실하고, 요구할 수 없으며

기도하여 구할 수도 없는,

문득 시작되는 지속이여,

그대는 이제 이렇게

한 편의 시가 되었다.


(어떤 이미지도 지속의 직관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매우 상이한 사물들의 질서에서 끌어져 나온 다양한 많은 이미지들은 그 작용의 수렴을 통해 붙잡아야 할 어떤 직관이 존재하는 바로 그 지점으로 의식을 이끌어갈 수 있다. - 앙리 베르그손)


- 같은 책, 3부 "지속의 시" 중에서 발췌, 221~260쪽





시집의 제목을 본다. ‘시 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1. 시의 없음(=불가능성)과 없음 사이에서 “가장 쉽게 휘발되고 마는 감정”을 붙잡아 “돌연한 지속”으로 이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2. 시는 없지만 그 ‘없음’의 ‘있음’을 직관으로 붙드는 그런 삶 아닐까 하는 생각.


3. 없음의 있음을 붙드는 그리고 돌연히 지속하는그런 삶이면 좋겠다는 생각.


(2019-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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