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어떤 시선과 어떤 자리 - 문학동네 시인선 100 기념 티저 시집


# 어떤 시선과 어떤 자리

시인들은 '언어'를 통해 세상을 드러내려 한다. 그 세상이 말할 수 있는 것이든 말할 수 없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드러내려는' 안간힘이 각고의 언어로 형상화될 수는 있어도, 언어 자체만으로는 그 도저한 심연에 닿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안다. 닿기는커녕 슬쩍 건드리는 것조차 어렵다는 것도.

그런데, 닿을 수 없는 불가능을 전제한 채 언어에 파고든 흔적은 뜻밖의 가능성을 낳는다. 언어의 옷자락을 물고 늘어지다 보면, 보시(布施)하듯 (하나의 대상을 수렴해낸) 언어가 또 다른 언어를 불러다주는데, 이때 불려온 언어가 뜻밖의 시야를 열어주는 것이다. 추출되고 정제되어 하나의 형태로 수렴된 단어가 물에 불어 제 무한한 몸피를 회복하는 동시에, 품고 있던 온갖 (괄호 쳐진) 성분들을 물 속에 뭉근히 풀어낸다고나 할까.

새로 열린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나는 무주공산에 깃발을 꽂듯 어느 '시점'을 골라 획득한다. 그 시점에서 시선이 뻗어 나오고 그 시선의 힘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던 연결이 가능해지는 것이리라. 시점은 좌표인 셈이고, 좌표를 매길 수 있는 것은 자리로서 기능한다.



# 25명의 시인들이 드러내는 시와 산문

이 책을 기획한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세상의 모든 폭력에 반대하여 싸우는 시인’을 상정하고, 그 수단과 방법으로서 언어를 조명한다.

그들은 시인이라서 무엇보다도 언어를 통해 그러기를 원한다. 극소량의 폭력성도 함유하고 있지 않은 언어의 상태에 도달하여, 그로써 세계의 폭력성을 드러내려고 한다. 자주 오해되지만 그런 비폭력적인 언어의 상태가 순한 단어와 예쁜 표현들로 달성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떤 '시선'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그런 시선을 가능케 하는 어떤 '자리'에 설 때 생겨난다. 그럴 때 시인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시를 읽으면 또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서문 중에서

어떤 '시선'을 확보한 어떤 '자리'. 나는 이 표현에 잠시 머무른다.

이 책에서 눈여겨볼 만한 점은 시인 한 명당 각각 시와 산문(이라는 명분의 또 다른 시) 한 편씩을 나란히 선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말이 산문이지, 본인이 쓴 시의 각주이자 편지의 추신에 가깝다. 스물 다섯 명 시인들의 시와 산문 50편이 추려진 셈이다.


신선하고 반갑다. 모호한 것을 모호한 채로 드러내는 것이 시의 속성이라고는 하지만 조금 더 선명했으면 싶은 아쉬움이 드는 시를 마주할 때 드는 바람이 바로 ‘시인 자신이 달아주는 각주’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각주를 달지 못하는(그리고 달아서도 안 되는) 시인의 마음을 십분 헤아린다면 이 ‘모호한 힌트’로서의 산문은 제법 바람직한 절충점이자 시의 대중적 확산을 염두에 둔 기획으로 여겨진다. 기획자 중 한 명인 박상수 시인의 말처럼 “기쁜 애씀”이 느껴진다.
예컨대 배영옥 시인의 시 ‘시’와 그 뒤로 나란히 놓인 산문 ‘고백’을 보자. (시는 녹색, 산문은 적색으로 구분했다)



원시 생물이 첫 눈을 뜰 때/ 딱딱한 캄브리아기의 시간을 뚫고/ 이제 막 새것인 시신경이 머리 주위로 모여드는,/몸 일부를 건네주고 눈 하나를 받을 때/ 껍질은 갈라 터지고 환부를 찢어발기며/ 처음 통증을 마지막 통증으로 다독이는,/ 통증의 말단으로 온몸이 집중하는 순간/ 검은 눈망울이 빛과 어둠을 가르고/ 바깥세상과 만날 때/ 마침내 ‘보다’라는 의미를 가진/ 말의 물거품이 떠오르고/ 첫 눈빛 세례를 받은 바닷속/ 풍경 하나가 반짝, 반응할 때/ 세상이 드디어 어린 영혼의 / 외로움까지 감싸안으며 더욱 짙어지는,/ 한 생명이 자기 안의 어둠과 대면하는 바로 그 순간

고백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아직 말하지 않음으로
나는 모든 것을 말하였으므로.


어떠한가. 위의 시는 제목 ‘시’를 가리고 시 본문부터 읽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제목을 본다면? 제목이 곧 이 시의 각주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고백’이라는 산문은 어떠한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시’라고 생각한다는 고백이라니. 어느 것이 시고 어느 것이 산문인가.

앞에서 머물렀던 시선,과 자리,를 다시 복기한다. 이 책에서 (분류한) ‘시’와 ‘산문’은 각각 ‘시선’과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시선’ 자체가 곧게(혹은 울퉁불퉁) 드러난 것이 시라면, 그 시선을 있게 한 ‘자리’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산문 아닌가 하는 생각. 물론 이 책에 한정해서 적용할 수 있는 나만의 생각일 뿐이지만.

이번엔 손택수 시인의 시와 산문이다. (산문이라고 반복하여 말하는 것이 어째 어색하긴 해도)

산색(山色)

산등성이의 신록이 등성이 너머로 번진다/ 산빛이 산을 벗어나서,/ 공제선 너머/ 무한으로/ 산을 넘치게 하는 것 같다/ 번지는 산빛으로 하여 산이 흔들흔들/ 표나지 않게 움직인다/ 저 색을 뭐라고 불러줘야 하나/ 능선 밖으로 뿜어져나오는 색, 있는데/ 틀림없이 없는/ 저 빛깔,/ 툇마루 끝에 나앉아 해종일/ 앞산을 보고 있던 노인의 말년이 마냥 적적키만 한 것은 아니었겠다/ 가만히 앉은 채로 저를 넘어가는/ 넘어가는/ 산빛/ 노인이 묻힌 산 그림자가 들판을 건너온다/ 혼자 남은 내가 산등성이를 더듬듯이/ 떠나온 들판을 쓰다듬으며/ 쓰다듬으며 온다


시와 시 너머

시(詩)의 사(寺)는 ‘절’이기도 하고 ‘집이나 관청’의 뜻을 갖고 있기도 하다. 불교 전래 이전엔 카오스에 코스모스를 부여하는 일종의 제도나 문화 행위로서의 뜻이 강했는데 이런 일상적 요소 위에 비일상적 요소가 더해진 것이다. 그러니까 시라는 말 안에는 제도나 문화 혹은 언어 같은 일상의 영역과 그 너머의 무한 공간이 겹쳐져 있다. 언어는 부재하는 것들과의 교감을 통해 신생을 누린다.


일상의 영역과 그 너머의 무한 공간이 겹쳐져 있는 시의 영토. 부재하는 것들과 교통함으로써 새롭게 태어나는 언어. 그러한 언어로 구성된 시는 글인가 글이 아닌가. 통상적 의미의 ‘글’은 일상의 영역에 속해 있다. 부재의 공간은 비일상적(비언어적) 세계에 속해 있다. 그렇다면 시는 글이면서 동시에 글이 아닌 셈이다. 두 세계의 접점에서 교묘한 교집합을 이루어내는 시는, 언어라는 매개의 태생적 한계 때문에 자칫 일상의 영역으로 기울어지기 쉽다.


나는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라는 말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이 책의 제목이 품고 있는 함의는 바로 이 너(부재하는 대상과 세계)의 아름다움이 (팽팽한 교집합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온통 (일상 영역의) 글이 될까봐 노심초사하는 대개의 시심(詩心)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뒤늦게 이 책의 제목이 오병량 시인의 시 ‘편지의 공원’에서 따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젖은 베개를 털어 말리고 눅눅한 옷가지에 볼을 부비다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쓰다만 편지를 세탁기 넣고는 며칠을 묵혔다 (오병량, ‘편지의 공원’ 중에서)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라는 말은 바로 언어의 ‘속절없는 비껴감’ 혹은 '미끄러짐'에 대한 착잡한 우려이자 담담한 수용 아니겠는가. 직관으로 관통해 압축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언어는 종내 군더더기 가득한 문장들이 될까봐.

한편, 전영관 시인의 시 ‘퇴근’과 산문 ‘길항(拮抗)’은 일상의 영역으로 좀더 몸을 기울인 현실감이 오히려 시적 감흥을 높이는 경우라 흥미롭다.


퇴근

생활의 의문이란/ 바람에게 행선지를 묻는 일/ 연애도 안부도 없이 상스러운 거리에는/ 돌아보면 눈빛 깊어지는 사람들/ 하늘을 보지 않는 사람들// 강이 먼 도시에 저녁이 오면 노을로 하루를 씻고/ 집에 돌아와 갓난쟁이의 맑은 이마에/ 순은의 별들이 피어나는 것을 보아라/ 생계의 고단함을/ 아내의 흐트러진 귀밑머리에서 찾아보아라// 습관성 후회란/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직후에 스치는 아쉬움/ 잔 욕심의 이복형제 같은 것들일 뿐이다/ 다친 손가락 같이/ 실수가 잦은 오늘을 견뎠으니 애썼다// 능란한 바람도 모퉁이에 무릎 다치고 운다

길항(拮抗)

직장이 있었기에 나는 그나마 시를 쓸 수 있었다. 맹자께서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이라 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아도 바른 마음을 가질 만큼 나는 고매한 선비까지는 못 되는 인간이다. 카드 결제일에 부대끼는 호모 머니쿠스인 것이다. // 시와 직장 중에 무엇이 내게 먼저 도착한 난치병일까. 완급을 잘 다스리고 지내야 한다. 그러나 무업(巫業)을 중단하면 병이 재발하는 것처럼 나는 발병과 치료를 반복하며 산다. (…) // 나는 매일 시(詩)로부터 퇴근한다. 퇴근해야만 한다. 퇴근과 동시에 내게 주어진 남편, 아비, 아들이라는 소임에 근무해야 한다. 거부하지도 못하는 당연직이니 어쩔 것인가. 진정한 퇴근이란 거부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의 퇴근이다.


홍지호 시인의 산문 ‘끝나면 안 되는 문장’을 보자.


끝나면 안 되는 문장

슬프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시는 시입니다/ 시는 다만 시에 도달해야만 시가 될 수 있었던 것 동시에 시에서 멈춰야만 시가 될 수 있었던 것// 슬프게도 나는 나입니다 당신은 당신입니다// (…) 시는 시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이고 당신은 당신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홍지호 산문 ‘끝나면 안 되는 문장' 중에서)


시는 다만 시에 도달해야만 시가 될 수 있다. 시는 시에서 멈춰야만 시가 될 수 있다. 시는 시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를 낳는 ‘시선’과 ‘자리’를 언어로 갈무리한다는 것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느껴진다.

시에 도달하지도, 시에서 멈추지도 못하는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산문’이 될까봐 나는 ‘시’를 쓰지 못하나 보다, 라고.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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