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배후

2016 시인동네가 주목하는 올해의 시인들 101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배후가 되겠습니다


시인동네 웹페이지를 처음 방문했을 때 마주친 문장이다. 나는 잠시 멍하니 이 문장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배후,라는 말이 내게 힘을 쓴 모양이다.


배후,라는 말을 사전에서 확인해본다. 한자로도 다시 써본다.

背後. 등의 뒤. 어떤 대상이나 대오의 뒤쪽. 어떤 일의 드러나지 않은 이면.


보이지 않게 나를 움직이는 힘. 마음에 든다. 왠지 모르게. 왠지 모른다는 것은 조금 무책임해 보인다. 왠지 알 수도 있을 텐데, 굳이 캐내지 않아도 그 단어가 주는 기운을 넘치게 받아들일 수 있으니 왠지 모른다,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인지도.


시인동네에서 펴낸 <2016 시인동네가 주목하는 올해의 시인들 101>을 읽었다. 시집을 읽을 때 마치 주역 점 보듯 책장을 펼치는 경향이 있다. 차르륵 64괘 중 하나를 뽑아드는 것처럼. 내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져 내려간 종잇장들이 어느 순간 멈춰 지목한 곳을 우선 주목한다.


그런데 이 시선집은 그러한 습성을 차단한다. 차근차근 읽게 된다. 읽는 이로 하여금 성실성을 요구하는 듯하다.


물론 모든 시들이 다 좋을 수는 없다. 여기서 '좋다'는 것은 내가 느끼는 감응의 정도를 의미한다. 천천히 곱씹고 싶고 여백마저 관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시가 내겐 좋은 시이다.


익숙한 이름의 시인도 있고 처음 보는 시인들도 많다. 이름표를 떼고 읽는다. 이름표 없는 시들도 내 이름을 묻지 않는다. 내 자의식 따위에도 관심이 없다. 나 또한 시인의 자의식을 들여다보려 애쓰지 않는다. 그냥 시가 시로 온다. 시가 시로 와서 좋으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모든 시가 다 그런 것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시적 완성도는 뒤로 밀려난다. 나는 심사위원이 아니다. 비평가도 아니다.


한 시인의 시집을 읽을 때엔 사정이 좀 다르다. 시인의 자의식을 암암리에 살피게 된다. 일관되게 흐르는 시의 결 혹은 가닥을 잡으려 애쓰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즉 나의 화두를 걸어두고 일목요연하게 시를 읽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집을 관통하는 정서 혹은 질문이 나의 것과 어떻게 맞물리는지 고심하는 사이 어떤 시들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기도 한다.


이 책에 실린 101개의 시는 101명의 시인이 각자 하나씩 고른 자선 대표작이다. 출판사에서 꾸리고 묶은 시선집과는 조금 다르다. 시인의 각별함이 더해져서 그럴 것이다.


띄엄띄엄 읽게 되는 평소 습관과는 달리(한 시인의 시집인 경우 건너뛰며 읽어도 같은 시인의 작품이기에) 시 하나하나를 살뜰히 들여다보게 된다.


101명 시인 각자가 택한 하나의 자선 시,라는 위엄 때문일 텐데, 그래서일까, 유명 시인의 시집을 읽을 때보다 귀퉁이를 접는 횟수가 늘어난다. 한 시인이 일군 여러 시들의 결 하나하나를 다르게 감지하는 것보다, 101명의 시인이 낳은 101개의 시 하나하나를 독특한 개성으로 읽어내는 것이 집중도를 높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문장이 주는 이미지는 위력적이다.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배후가 되겠습니다,라는 저 문장은 왠지 모르게(여전히?) ‘먹먹한 주먹을 입에 물고 있는 서글픈 표정’을 연상시킨다. 시선집 초반부에 실린 고영 시인의 ‘저녁이 다 오기 전에’라는 시의 마지막 문장을 인용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표정이 한층 선명해진다. 이 시의 마지막 세 연을 옮겨본다.



내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나는 포도나무에 필 꽃들을 기다리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소식을

영영 기다릴 수밖에 없는 폐허의 심정으로

천천히 저녁을 걸었다


포도넝쿨은

왜 한사코 서쪽으로만 뻗어 가는지

포도밭에서 건너온 노을이

흐르는 강물을 다 건너가기 전에


포도나무도 모르는 포도나무의 배후가 되고 싶었다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배후가 되고 싶었다


- 시인동네, <2016 시인동네가 주목하는 올해의 시인들 101>, 고영, ‘저녁이 다 오기 전에’ 중, 21쪽 (<유심> 2015. 1월호)



배후. 드러나지 않은 이면을 읽는 일은 마음 뻐근한 일이다. 쉬이 돌아보지 못하는 등 뒤의 기척을 묵묵히 감지하는 일은 또 얼마나 눅진한 일인가. 여기 윤명수 시인의 ‘흉상(胸像)’이 그러하다.



오직 한 방향으로만 바라보도록

나는 고정되었다


의심만 들끓던 귀는 닫고

가벼운 혓바닥이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입도 봉해버렸다


차갑기만 하던 마음이 따뜻해지도록

가슴만 겨우 남겨두었다


칼을 벼리던 손은

버린 지 오래


그래서 언제나 배후가 불안했다


등 뒤에서 나를 주시하는

너를 보지 못한 채

흉물이 되어버릴까 봐

평생 뜬눈이었다


- 같은 책, 137쪽, (<시인동네> 2015. 겨울호)



불안한 배후는 어쩌면 평생 부릅뜬 각성을 종용하는 유일한 보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정체가 무엇이든, 나도 모르는 나의 배후가 되어주는 모든 것에 축복을!


(2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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