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우습고도 슬픈 시집이라니

제임스 테이트 시집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


시집을 읽으며 이토록 웃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슬며시 미소를 지은 적은 있어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웃기기만 한 시들이 아니라는 것을. 웃음은 종내 슬픔에 가닿는다는 것을.


뭔가를 쓰다가 막힐 때,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정확한 단어라니, 과연 가능한 일일까),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펼치곤 한다. 시집일 확률이 높다. 저혈당이 왔을 때 급한 대로 가방을 뒤져 초콜릿을 삼키는 당뇨 환자처럼.


동사 하나에 막혀 있다가, 명사 하나에 주저하다가, 자음 하나에 망설이다가. 환기가 필요했다. 문득 얼마 전에 출간되었다는 제임스 테이트 산문시집이 떠올랐다. 최정례 시인이 옮긴 초역 시집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가 그것.


서점에서 후르륵 펼쳐 눈이 가는 대로 읽어본다. 늘 그렇듯 첫 몇 시, 중간의 두어 편을 무작위로, 마지막 서너 편을 연달아 읽는다. 이거, 굉장한데! 시집을 구매하기로 결심한다. 직접적 계기가 된 시들 중 하나는 마지막 부분에 실린 '어느 일요일의 드라이브'라는 시. 전문을 실어본다.


마고가 "차 좀 세워. 오줌 눠야 돼"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외딴 곳에 나와 있었다. "세상에." 내가 말했다. "어디로 가서 오줌을 눈다는 거야?" "나무 뒤나 아니면 어디든지. 어디든 상관 없어. 난 바로 지금 오줌을 눠야만 한다고." "좋아, 그러나 제발 아무도 당신을 보지 않기를 바라." 내가 말했다. 그리고 차를 갓길에 세웠다. 난 그녀가 숲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서 꽤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다. 난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때, 난 그녀를 얼핏 보았는데, 날고 있었다. 숲은 빽빽했다. 그녀는 최고로 편안하게 나무 사이를 활강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좀더 잘 보려고 차에서 내려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마고, 내려와." 내가 소리쳤다. "그럴 수 없어." 그녀가 소리쳤다. "뭔가 내 엉덩이를 물었고, 그래서 난 지금 날아다니는 병에 걸렸어." 난 말이 안 나왔고, 그녀의 우아함에 감탄할 뿐이었다. 힘들이지도 않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지?" 내가 말했다. "당신이 활을 쏴서 나를 관통시켜야 될 거야." 그녀가 대답했다. "난 활이 없는데." 내가 말했다. "그리고 더군다나 내가 어떻게 당신을 활로 쏠 수가 있겠어. 난 당신을 사랑해!" "내 생각에 이 날아다니는 병은 평생을 갈 거 같아." 그녀가 내 머리 위에서 활강하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희미한 빛 속으로 가버렸다. 나는 빙빙 돌면서 걸어다녔고 죄 없는 나무만 발로 찼다. 그녀는 부름을 받았다. 누가 불렀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아주 강력했다. 어느 일요일의 드라이브, 숲에서의 오줌 누기, 그리고 이제는 이런 일이.


- 제임스 테이트,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 '어느 일요일의 드라이브', 창비, 257쪽



매력적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풍크툼(punctum),이 떠오른다. 찌르듯 파고들어오는 것. 낯선 표정으로, 낯설지만은 않은 전언을! 산문시의 매력을 이런 식으로 느껴본 적은 없다.


구체적인 이미지와 의미보다는 '전체로서 육박해오는' 무엇(인상이라고 해야 할까)이 현대시의 미덕일 텐데, 마치 한 편의 (손바닥) 단편소설 같은 형식으로 그 '전체'를 경험하게 해주는 독특한 방식이다. 풍크툼의 개념처럼, 감상하는 자의 내적 경험 속에서 지극히 개인적으로 작품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사실 모든 시가 그러하긴 할 텐데.)


옮긴이가 말했듯 “이런 식의 이야기들이 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이 시집은 우리가 본 지금까지의 어떤 시와도 닮지 않았다.” 그러나 또렷하게 감지할 수 있는 시적 유비(類比)와 아이러니, 그리고 알레고리는 시의 세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숲에서 오줌을 누다가, 뭔가에 물려, 날아다니는 병에 걸린 여자. 날아다니는 병,은 무엇일까. 누구나 무언가에 붙들려 오래도록(혹은 단숨에) 앓는 것이 있을 텐데, 그 병은 피할 수 없는, 어쩌면(오히려) 제대로 걸리고 싶은 욕망의 ‘병’일지도 모른다. 현실 속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낮은, 본질적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그러나 (부럽게도) 시 속의 그녀는 부름을 받았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외침이 어울릴 법한 시적 정황들은 시집 전체를 관통한다. 제임스 테이트를 미국 초현실주의 대표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들(기욤 아폴리네르를 위시한)과는 결이 다르다.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듯하면서도 공중에 붕 떠 있는, 그런 일상적 초현실 풍경이랄까. 그런데 거기 단단한 정수가 흐르고 있으니 바로 ‘유머’이다. 그의 기묘한 유머와 재기 발랄함은 직접 시를 읽어보아야만 느낄 수 있는 것. 예컨대 다음과 같은 같은 시.


오늘 나는 정말로 이상한 것을 우편으로 받았다. 그것은 내가 사막에서 낙타를 타는 사진이었다. 그러나 나는 낙타를 탄 적이 없고 사막에 가본 적도 없다. (…) 나는 돋보기로 그 사진을 살펴보았다. 그건 확실히 나였다. 나는 그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가 사막에서 낙타를 타는 것은 꿈꿔본 적도 없다. (…) 내가 어떤 성스러운 전쟁에서 싸우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거기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었다. 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이 사진을 감춰야 한다. 그들은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면 안 된다. 나도 알면 안 된다.


같은 책, ‘낙타’, 59쪽


‘애런 노박의 사건’이라는 시를 읽으며 큭큭거리다가, ‘의무에 묶여서’라는 시에 와서는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결국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고 (참은 웃음의 폭발력 때문인지) 결국엔 눈물까지 흘렸다. 백악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시적 화자는 대통령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냥 행동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 사실을 누구에게든 말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 된다. ‘정상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의식적 압력이 세질수록, 비정상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아이러니가 퍽이나 재미있고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한판 배를 잡고 웃었더니(다른 사람도 이와 같은 코드에 웃음을 터뜨릴지는 모르겠으나), 성석제의 소설 <재미나는 인생>이 떠오른다. 당시 타국의 카페에서 이 책을 읽던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곤욕을 치렀다. 그런데 그게 그저 웃기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작가 자신이 소설 속에서 말했듯 “흥이 다하면 슬픔이 온다는 것, 또는 흥이 다하지 않은 슬픔은 가짜라는 것, 환락이 절정에 이르자 오히려 슬픔의 정이 몸에 스민다(歡樂極兮哀情多: 漢武帝, 秋風辭)는 교훈”(성석제, <재미나는 인생>, ‘우렁각시에게’ 243p)을 은근히 전한다는 점에서, 제임스 테이트가 말한 내용과 교묘히 겹친다. 책의 뒷표지에 실린 시인의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우스운 시를 좋아한다. 그러나 당신 가슴을 찢는 시를 더 좋아한다. 한 편의 시에서 이 둘을 다 쓸 수 있다면 그게 최고다. 초반에는 웃다가 끝에 가서는 눈물로 마감하는 것. 그게 최고다. 이런 것은 우리에게 보상을 주고, 내게도 보람 있는 일이다. 나는 궁극적으로 진지하기를 원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우스운 면이 있다. 내가 이 두 가지를 할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내가 그것을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 제임스 테이트


웃음은 슬픔과 등을 맞대고 살아간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어느 날 문득 돌아서서 슬픔을 안아주는 것. 그것이 웃음 아닐까 하는 생각. 웃음과 슬픔은 서로의 배후인 셈이다.


뭔가에 가로막혀 있던 내가 이 시집을 통해 어떤 구체적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진지해(혹은 굳어)지기만 하는 나의 경향을 다른 눈초리로 보게 된 것은 뜻하지 않은 수확. 지난 몇 년간 나는 왜 유머와 아이러니를 잊고 지냈나.


시집 제목과 같은 동명 시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를 읽는다. 세 페이지에 걸쳐 진행되는 이야기. 일부를 발췌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전체를 읽어야만 다가온다. 시적 주인공 '폴리'가 희미한 기억밖에 남지 않은 지하도시 바로 ‘그’ 장소로 돌아가는 내용이다. 나 또한 돌아갈 그때 혹은 그곳을 불현듯 상기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쓸 수 있다면.


(2019.11)


그는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하여 새 길을 탐색하고 있다.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시를 시작하는 것이 그의 천재성이며, 그에게 있어서 시는 다 써질 때까지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 그것이 그의 시가 가진 매력이다. 테이트는 독자들을 약간 멍한 상태로 두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내게 반(反)시야말로 시의 가장 좋은 친구였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해준다.

- 찰스 시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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