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에 대한 네 가지 생각
# 생각 하나. 열광했던 일에서 실패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영화감독 중 하나. 우디 앨런이 한 말.
"저는 제가 열광했던 일에서 실패하는 것이
잘하는 일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기뻐요."
- 영화 <우디 앨런: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Woody Allen : A Documentary> 중에서
여기서 쓰인 '실패'라는 단어. 곰곰이 생각해본다. 실패,를 꾸며주는 말이 뜻밖이어서.
어떤 실패? 쓰라린, 뼈아픈, 뭐 이런 따위의 부정적 수식어가 아닌, "내가 열광했던 일에서"라니.
그렇다면 '열광했던 일에서 실패하는 것'이라는 말에서 방점이 찍힐 곳은 '실패'가 아니라 '열광'이겠군.
# 생각 둘.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으로서의 시 쓰기
몇 년 전 지인 S가 말했다. 좋아하는 일보다는 잘하는 일을 해야 가시적인 결과를 뽑아내지 않겠느냐고. '잘하는 일'은 보다 현실적이고, '좋아하는 일'은 단지 이상적인 것일까. S는 오랫동안 잘해온 일로 두 권의 책을 냈다. 게다가 S에게 잘하는 일은 좋아하는 일이기도 했으니 그녀의 조언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일을 해온 것을 아는 S는 내 경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관련 분야의 글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했다. 무엇을 하든 늘 내 뒤꼭지를 잡아당기는 것은 문학이었기에 머리로는 그녀의 조언에 수긍하면서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8년 전 잠시 일을 접고 해외로 이주할 즈음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 시 쓰기 때문이기도 했고.
페르난도 페소아가 말한 것처럼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기에, 오롯이 나의 내면에 집중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언어로 바꾸어보려는 (불가능해 보이는) 열망에 나를 온전히 거는 시간이 좋았다. 해외생활은 마음을 다치는 시간의 연속이었지만, 고립과 고독의 시간은 글을 쓸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해주었다. 자주 시를 생각했지만 가끔 시 같은 것이 부스러져 나왔고, 운 좋은 날엔 시 한 편이 마무리되기도 했다. 완결된(아니 완결되었다고 믿는) 시 앞에서 나는 현실의 무게를 벗고 조금은 가벼워졌다. 시를 공부한 적도, 제도권에서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나는 철저하게 아마추어였지만, 시 쓰기는 취미가 아닌 생존 방식에 가까웠다. 시에 대해 과연 내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실패했다는 것 혹은 여전히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붙잡을 수 없는 이미지, 달아나버리는 단어, 계속 미끄러지는 말, 말, 말들. 쓰고 나면 가벼워졌지만, 쓰고 나서 뒤돌아보면 참담한 흔적만이 눈에 띄었다. 감정의 하치장 혹은 섣부른 은유의 과잉.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나만 아는 이야기로 전락하는 과정. 시 쓰기에 관한 한 처참한 자기 인식의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쓰지 않고는 버틸 도리가 없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달래는 데 다른 방편을 찾기는 어려웠다. 마음이 바닥을 칠 땐 책도 음악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릴없이 쓰고, 하릴없이 절망하고. 그 반복의 시간을 뭐라 불러야 할까. 우디 앨런의 말처럼 나는 하릴없이 열광했는지도 모른다. 그 끝없는 실패의 과정에서 어쩌다 건져 올리는 차이, 그 차이가 주는 에너지 때문에 나는 기뻤는지도 모르고. 이성복 시인이 시론집 <무한화서>에서 밝혔듯, 시 쓰기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일 테니까.
# 생각 셋. 성공=계속 열망할 수 있는 능력
다시 우디 앨런의 말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열광했던 일에서 성공하는 것". 이런 조합은 불가능한가? 여기서 '성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쩌면......
열광했던 일에서 실패를 거듭해도 계속 ‘열광할 수 있는 능력’. 그러한 능력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성공 아닐까 하는 생각.
열광,이라는 말을 열망,이라는 말로 슬쩍 바꾸어본다. 그렇다면, 이 독특한 문맥에서의 ‘성공’이란 ‘계속 열망할 수 있는 능력’ 정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샤를 페팽은 자신의 저서 <실패의 미덕>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실패를 겪으면서 자신의 열망을 시험하고, 때로 열망이 시련보다 더 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샤를 페팽, <실패의 미덕>, 마리서사, 53쪽
그는 '의외의 기쁨으로서의 실패'를 다루며 이렇게도 말했다.
"프로이트 관점에서 실패는 실패 행위이자 동시에 성공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의식적인 의도에 비추어 보았을 때에는 실패했지만 무의식의 욕구에 비추어 보았을 때는 성공했다는 것이다." (같은 책, 102쪽)
프로이트는 '실패는 무의식 발현의 성공'이라고 주장한다. "활동적이고 역동적인 에너지인 무의식은 적절한 때에 실패한 행위를 통해 자신을 표출한다"는 것. 자크 라캉도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실패한 행위에는 성공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나는 계속 실패하는 중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계속 성공하는 중인가?
# 생각 넷. 내정된 실패, 오래된 실패
내가 좋아하는 젊은 시인 중 하나. 안희연의 첫 시집 마지막에 수록된 시.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염색공은 골몰한다 / 흑백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어떤 색을 입힐 것인가 /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그가 / 얼결에 페인트 통을 엎질렀을 때 / 우리는 태어났다 // 우리는 그의 아름다운 실수 / 돌이킬 수 없는 얼룩들 (중략)
내정된 실패의 세계 속에 우리는 있다 / 플라스틱 병정처럼 / 하루치의 슬픔을 배당받고 걷고 또 걸어 제자리로 돌아온다 / 우리는 그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 풀리지 않는 숙제 / 아무도 내일을 믿지 않는다 // 그러나 우리에겐 노래할 입이 있고 / 문을 그릴 수 있는 손이 있다 (중략)
먼 훗날 염색공은 / 우리를 떠올릴 것이다 / 우연히 그의 머릿속 전구가 켜지는 순간 // 그는 휴지통을 뒤적여 오래된 실패를 꺼낼 것이다 / 스스로 번져가던 무늬들 / 빛을 머금은 노래를
- 안희연,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 중에서
내정된 실패,와 오래된 실패,에 밑줄을 긋는다. 그렇게 되어 있기로 예정된 실패는 오래된 내력을 지녔다.
내정된 실패는 계속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실패는 또 실패할 열망을 낳을 것이고. 그렇게 스스로 번져가는 ‘실패의 무늬들’은 때로 빛을 머금어 반짝이는 노래나 그림이 되기도 할 것이다. 시적 화자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겐 노래할 입이 있고 문을 그릴 수 있는 손이 있"으니.
오늘 그렇게, 실패에 관한 글을 쓰는 데 또다시 실패한 나는, 계속 (실패를 열망하는 것에) ‘성공'하는 수밖에.
인간은 자신 없이 행동하고, 망설이고, 주저하면서 성공을 향한 희망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계획을 세우는 유일한 동물이다. - 앙리 베르그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