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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아 Oct 24. 2021

무명작가의 유명한 일기

별이 빛나는 낮에

용 감독님의 진짜 면접은 다음 미팅 때 진행되었다. 요령껏 숙제를 사흘간 미루고 난 뒤의 일이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다시는 졸지 않도록’ 잠을 푹 자고 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감독님은 원작에 대한 소감을 물었고 나는 ‘주인공이 비호감’이라고 내 소신을 밝혔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포장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때까지의 나는 작가보다 시청자에 가까웠고 느낀 대로 털어놓는 게 작품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용 감독님은 자신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며 나에게 동의해주었다. 뜻밖이었다. 여기서 뜻밖이라는 건 생각이 같아서가 아니었다. 너무 쉽게 나를 인정해준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용 감독님에 대해 털어놓자면 한국 드라마의 역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분이었다. 남다른 통찰과 파격,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 섬세한 표현력으로 작품마다 많은 마니아층을 형성하던 분이었으니 말이다. 그분 역시 이 세계의 별이었고 나는 아직 돌덩이조차 되지 못한,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인정해 준다고?


어쨌거나 용 감독님은 찬찬히 나의 의견을 들었고, 적당히 핑퐁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아이디어를 펼쳐 보였다. 일의 성사 여부를 떠나 신기한 경험이었다. 곰 감독님과의 작품 이후, 나의 생활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장편 소설 두 권을 출간한 것이 고작이었다. 고작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작품을 폄하해서가 아니라 드라마 작업을 하는 이들에게 그다지 어필이 되지 않는 이력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무명작가에게 눈앞의 어른이 보이는 배려와 공감능력은 감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용 감독님이 무명작가를 흔들었던 건 이후의 일이었다. 자리를 일어나기 직전, 용 감독님은 작가에게 넌지시 마무리 멘트를 던졌다. 


“그럼 이번 주까지, 저하고 일하고 싶으신지 생각해보시고 연락 주세요.”


순간 머리가 멍했다. 시험을 보러 간 수험생에게 채점을 하라 답지를 내미는 기분이었다. 사실 누가 봐도 그 자리는 용 감독님이 무명작가를 발탁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분은 결정권을 무명작가에게 넘기면서 아티스트에 대한 존중을 표했다. 성공한 사람의 품격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온몸으로 느꼈던 순간이었다. 


나는 구차하게 지금 당장이라도 대답해주겠노라 말할 뻔 한 걸 억지로 참았다. 나도 잘나 보이고 싶었다. 그래, 작가와 감독은 수직관계가 아니라 파트너야. 알량한 자존심이 무명작가를 다독였다.  


이쯤에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날 오후, 무명작가의 눈에 반짝이던 그 별이, 수년간, 그 빛을 한 번도 잃지 않았는지에 대해 말이다. 물론 그렇지 않다. 하트가 생겼던 눈에 쌍심지가 붙은 적도 있었고 감동에 일렁이던 마음에 서운한 한기가 들어찬 적도 많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용 감독님은 너무나 훌륭한 연출자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열악한 촬영 환경 속, 수 백 명의 스텝에게 계란 프라이 하나 더 얹어주려고 제작사와 맞서는 분이 바로 용 감독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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