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준택 Spirit Care Aug 28. 2021

"패치 아담스"처럼 산다는 것

<영화로 풀어가는 죽음학 이야기 2> / 영화 "패치 아담스"

- 영화 <패치 아담스>,  1998


죽음학은 실로 삶에 대한 학문이다. 살아 있는,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자살 미수, 그 후 제 발로 찾아 들어간 정신병원. 주인공 패치 아담스는 거기서 만난 어떤 노인과의 대화를 통해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그 노인은 한 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혁신의 대명사로 불린 유명한 기업가였다. 그 역시 제 발로 정신병원에 찾아왔는데 늘 사람들에게 손가락 4개를 펼쳐 보이며 몇 개로 보이는지를 묻고 다닌다. 물론 4개는 정답이 아니다. 어느 밤 패치는 그를 찾아간다. 그리고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물론 손가락 4개가 몇 개로 보이는지를 풀어야 했다. 여러분도 한 번 맞춰 보시라. 

#1

"손가락을 보지 말고 나를 봐, 너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문제에 초점을 맞추면 해결책을 볼 수 없어, 절대로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마. 나를 봐.... 손가락을 지나서 봐. 몇 개로 보여?

"여덟 개..."

눈앞의 문제에 매달리지 않고 그 너머에 시야를 두니 문제가 달리 보였다. 




"다른 이들이 못 보는 걸 봐. 두려움과 순응과 게으름을 넘어서 모든 이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걸 봐. 매일 세상을 새롭게 봐.... 만일 네가 나를 미치고 한 맺힌 남자로 봤다면 애당초 나를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물론, 패치도 노인도 미치지 않았다. 패치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의대에 진학한다. 자살시도와 정신병원 입소라는 좌절과 절망을 겪었지만 그 속에서 살아가야 할 길을, 살고 싶은 길을 찾은 것이다. 죽음과 절망은 때로는 우리에게 살아가야 할 길을 깨닫게 해 준다.   


#2

환자를 옆에 두고 의사와 학생들이 대화를 나눈다. 의사들에게 이 환자는 그저 치료의 대상인 "당뇨병 케이스"다. 당뇨병에 걸린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 사람이 걸린 "당뇨병"으로 환자를 본다. 사람 중심이 아니라 질병 중심이다. 그리고 환자가 옆에 있음에도 의학 이론적으로 다리를 절단하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를 서슴없이 한다. 환자는 겁에 질리지만 상관없다. 의사와 의대생들에게 둘러싸인 그 환자는 마치 연구대상 실험동물과 다를 바 없었다. 인격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패치는 환자의 이름을 물어본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준다. 환자를 당뇨병으로 대하지 않고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때서야 환자의 얼굴에 미소가 퍼진다. 

왜 병원에서는 사람보다 질병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걸까? 그것은 우리가 죽음을 다뤄왔던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근대 의학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질병은 치료해야 할 대상,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질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고 죽음은 치료의 실패를 의미했다. 현대 의학은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그렇게 죽음은 실패와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질병을 더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오직 대상화된 질병만 보이게 될 뿐이었다.     


우리가 평소 병원에 가면 자신의 이름으로 접수를 하긴 하지만 간호사나 의사를 대했을 때 듣는 첫마디는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라는 것이다. 당연한 것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한다. 같은 병일지라도 환자의 상태나 상황에 따라서 증상이나 치료방식은 달라야 하는데 병원에서는 그저 환자의 상태가 현대의학이 분류해 놓은 질병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만을 판단하기에 급급하다. 왜냐하면 그래야 거기에 맞는 치료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정된 시간에 많은 환자를 봐야 하는 의료 현실도 문제다.  


얼마 전 회사 근처 지하철역에서 병원 광고를 본 일이 있다. "질환 중심 치료"를 강조하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병을 잘 치료하겠다는 의미였겠지만 "사람 중심, 환자 중심 치료"라고 했다면 오히려 더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3

죽음학의 핵심 메시지가 담긴 장면이 있다.


동료 의대생 친구와의 대화이다.

"여긴 병원이야,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어가고 있어"

"우린 어차피 모두 죽어가고 있어, 트루먼. 우리가 할 일은 건강을 증진시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단지 죽음을 지체시키기보다는 삶의 질을 높여야 하는 거라구"

영화에서 패치는 3학년 전까지는 환자를 직접 대할 수 없다는 병원의 규정과 원장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많은 환자들을 직접 만나고 교류한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 만성질환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는 노인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성격 괴팍한 아저씨. 그들은 모두가 환자이기 전에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며 각자의 소망을 갖고 있다. 건강하지 못하기에 그 소망은 더욱 절실하고 간절하다. 수시로 좌절감이 들지만 병원에서는 그런 그들의 마음을 돌보지 않는다. 그들에겐 인간적인 교류와 따뜻한 관심이 필요한데도 말이다. 우리는 환자를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난치병, 불치병 진단을 받게 된 사람들과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학과 의술, 치료를 논하기 전에 그들의 인격과 인간적 존중을 논해야 한다. 패치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죽어가고 있다. 힘든 치료를 받는 환자에게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게 하고 고통 속에 시간을 보내다가 소중한 삶의 마지막 시간을 허비하게 해서는 안된다. 


이제 우리나라도 연명의료 결정 제도가 시행된 지 3년이 넘었고 지난 8월 10일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자가 100만 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실제로 주변에서도 삶의 마지막 시간을 좀 더 의미 있게 보내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잘 된 일이다. 

출처 :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4

위에서 언급했던 까칠한 아저씨 환자 얘기다. 처음에 패치가 그에게 다가가려 했을 때 그는 물건을 집어던지며 화를 냈고 마음을 굳게 닫고 관심을 거부했었다. 그런 그에게 패치는 다시 다가갔다. 날개 달린 천사 복장을 하고서 말이다. 그리고 대범하게도(?) 그 아저씨에게 죽음에 대해 말한다. 처음엔 사전에 나온 죽음과 관련된 표현을 모조리 읽어 준다.  


"사망, 죽음, 만기 됨, 지나감, 멸망함, 소멸됨, 떠나고 없어짐,.. 마지막 숨, 자연에게 빚을 갚음, 큰 잠, 천천히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

그런데, 한참을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패치의 장난 아닌 장난을 듣고 있던 환자는 놀랍게도 반응을 한다. 죽음에 대한 말 잇기 게임을 하듯이 말이다. 

"체크 아웃함"

패치가 응수한다. "이 죽을 코일을 없애버림" 이어서 환자가 말을 이어 간다. "행복한 사냥 장소로 감" 

"유난히 긴 시간 동안 눈을 깜박임"

"숨을 못 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함"

"놀랍게 썩어가는 사람이 됨"

"벌레 뷔페"...

그렇게 말 잇기를 하다가 결국 까칠한 그 아저씨는 소리 내어 웃는다. 그리고 둘은 지겨웠던 의료 장비를 뒤로하고 병실 밖으로 나간다. 물론 패치가 환자의 침대를 통째로 밀면서 말이다...

그 환자는 간호사들도 꺼려할 정도로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고통스러운 치료과정에 지쳐 패치가 다가갔을 때 멱살까지 잡으며 자신을 더 이상 고통스럽게 하지 말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패치는 죽음을 말했다. 아무도 그 환자에게 꺼낼 수 없는 단어였을 것이다. 하지만 패치는 그에게 죽음이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하며 그것을 직면하게 했다. 아마도 그 환자는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에서 죽음을 떠올리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그를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만 봤지 그의 삶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패치는 머지않아 다가올 죽음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결국 그를 웃게 했다. 물론 병실 밖으로의 탈출이라는 즐거움과 함께 말이다.


위 #2에서 설명한 대로 우리는 죽음을 필요 이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 하지만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은 특히나 생애 말기 환자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죽음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가족 등과 대화하는 과정을 통해 남아 있는 삶을 보다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환자처럼 그저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면 환자 본인에게나 사랑하는 가족에게는 삶을 제대로 마무리하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영화 속 환자는 주인공 패치 덕분에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지만 말이다.

환자를 돌보는 퀴블러 로스 박사(1926~2004)의 생전 모습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며, 말하고 싶거나 그럴 필요가 있는 '마치지 못한 과업'을 가지고 있다


영화에서 병원장이 패치를 비난했던 이유도 그랬지만 패치가 환자를 대하는 방식이 기존 관점에서는 무모하고 심지어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패치는 환자 개개인의 상황과 성향을 고려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했다.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자를, 환자 이전에 하루하루를 생활하는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필자의 글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죽음학의 대가 퀴블러 로스는 죽음과 죽어감의 개념을 구분하면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들이며, 말하고 싶거나 그럴 필요가 있는 '마치지 못한 과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화 속 패치의 행동은 퀴블러 로스의 말과 맥을 같이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그 까칠한 아저씨 환자의 이름은 빌이었다. 빌이 임종할 때 패치는 곁을 지킨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빌은 패치에게 얼마 전 같이 불렀던 노래를 불러달라고 한다. 패치는 부르고 빌은 숨을 거둔다.


#5

패치는 어느 날 병원에서 한 여인이 간호사에게 딸을 급히 봐야 한다고 애원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하지만 간호사는 절차상 문서를 먼저 작성해야 한다며 서류를 내민다. 그 여인의 딸은 사고로 생명이 위급한 상태였다.

병원과 의료계의 여러 가지 불합리한 모습을 보며 패치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식당에서 의료계의 불합리에 대해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도중 주변 테이블에 앉은 다른 손님들을 통해 여러 가지 경험담을 듣는다. 우리나라와 같이 보편적인 의료보험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은 미국의 현실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례들이었다.

"맹장이 터지기 직전에 병원을 갔는데 보험증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더라고요.."

"내 항생제 값은 한 달에 100불이야"

"발목이 삐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250불을 냈어"

"정부가 건강보험비를 지불해야 돼"

"건강보험 회사 때문에 모든 게 다 비싼 거야"


결심이 선 패치는 여자 친구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세상에서 첫 번째 생기는 재미있는 병원이 될 거야... 미끄럼틀이 있고 비밀통로가 있고, 오락실이 있고... 유머를 사용해 아픔과 고통을 치료할 거야. 의사들과 환자들이 동료로 함께 일할 거야. 직위도 없고 상사도 없고, 사람들을 돕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세상 곳곳에서 몰려올 거야. 기쁨이 삶의 방법인 공동체. 배우는 게 가장 높은 목표이고 사랑이 궁극적인 목적인 곳."

여자 친구는 도울 수 없다고 말한다.

"난 너와 달라. 패치. 난 흰 코트를 원해. 사람들이 날 의사라고 부르기 원해. 인정받길 원한다구... 넌 여기 앉아서 한계가 없는 삶을 얘기하고 있어. 규칙을 깨는 것 말이야. 매우 로맨틱한 소리야.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아? 바로 주변 사람들이 다친다는 거야"


패치가 말한다.

"어렵다는 건 알아, 하지만 가치 있는 일은 어렵다고 네가 말했잖아... 네가 돕는 환자들의 눈에서 네가 말하는 그 인정을 매일 받게 될 거야. 월콧 학장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어. 학장이 말하는 건 권력과 관리일 뿐이야. "


#6

패치의 여자 친구 코린은 결국 패치를 도와 무료병원을 짓고 같이 꾸려가게 된다. 그러던 중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그것도 그녀가 도우려 했던 환자로 인해서 말이다. 패치는 충격과 죄책감으로 모든 걸 그만두고 떠나려고 한다. 정리하기 위해 병원을 들렀을 때 한 때 그의 룸메이트였지만 패치의 능력과 재능을 질투하고 시기했던 친구 미치를 만난다. 미치는 그가 돌보고 있는 환자 중 패치도 알고 있던 케네디라는 할머니에 대해 고민을 털어놓는다. 


 "212호 케네디 여사 알지? 식사를 안 해. 지난 3주 동안 매일 찾아갔어. 하지만 식사를 하도록 할 수 없었어. 난 의학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어. 쉬지 않고 공부했어. 이 병원에 있는 모든 의사들보다 훨씬 잘하고 잘 진단할 수 있다고 장담해. 하지만 환자를 식사하게 만들지 못해. 패치, 넌 타고난 재능이 있어. 사람들을 잘 다뤄. 난 널 좋아해. 네가 떠나면 난 그걸 배울 수 없어.

결국 패치는 다시 돌아왔는데, 미치가 해결하지 못했던 케네디 여사의 식사문제를 바로 해결한다. 그것도 아주 즐겁게 말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패치가 환자의 질병만 본 것이 아니라 환자 자체, 사람을 먼저 봤기 때문이었다. 


#7

패치는 일전에 목장에서 무료 진료소를 운영한 것과 관련해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거기서 진료, 치료, 의사,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 목장으로 오는 모든 사람들은 환자이자 또한 의사입니다. 목장으로 오는 모든 사람들에겐 여러 종류의 육체적 정신적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환자입니다. 목장에 오는 모든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돌보도록 되어있습니다. 요리를 하던지, 목욕을 시키던지, 그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던지요. 그들 스스로가 의사라고 할 수 있죠. 광범위하게 말하는 거지만 다른 이를 돕는 게 의사 아닌가요? 언제부터 의사라는 말이 경이로운 것이 되었나요?... 언제부터 의사가 병을 고쳐주는 믿을만한 박식한 친구 그 이상이 되었나요? 제가 의술을 행했냐고 질문하셨죠? 그 말의 의미가 필요가 있는 이에게 문을 열고 고통받는 자를 보살피고 말을 들어주고 열이 떨어질 때까지 찬 수건을 대주고.. 만일 이것이 의술이라면 만일 이것이 환자를 돌보는 것이라면 난 죄명대로 죄를 지었습니다."


위원장이 반문한다. "당신 행동의 결과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까? 만일 환자가 죽었다면요?"

KBS 스페셜 <앎>, "에디냐와 함께한 4년" 중(2016), 에디냐 수녀님의 인터뷰. 그녀는 이 세상에서의 생을 마감하는 많은 이들과 친구처럼 가족처럼 함께했다. 
죽음이 잘못됐습니까? 뭐가 그렇게 두렵습니까? 왜 죽음을 인간답게 품위 있게 다루지 못하고 예절 바르고 유머감각으로 다루지 못합니까? 죽음이 적이 아닙니다. 


패치가 계속해서 답변한다. "죽음이 잘못됐습니까? 뭐가 그렇게 두렵습니까? 왜 죽음을 인간답고 품위 있게 그리고 때론 유머감각으로 다루지 못합니까? 죽음은 적이 아닙니다. 여러분. 만일 병과 싸운다면 가장 지독한 병인 무관심과 싸워야죠. 감정전이와 직업적 거리감에 대한 강의를 많이 들었습니다. 감정전이는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른 이에게 영향을 줍니다. 왜 환자와 의사 관계에서는 그걸 원치 않지요? 당신들의 가르침을 들었고 그게 잘못된 것이라고 믿는 이유입니다. 의사의 사명은 죽음을 막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병을 치료하면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죠. 사람을 치료하면, 장담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됐든 이기게 됩니다."

 의사의 사명은 죽음을 막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병을 치료하면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죠. 사람을 치료하면, 장담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됐든 이기게 됩니다


"오늘 이 방은 의대생으로 꽉 찼습니다. 여러분, 기존 의사들로 인해 마비되지 마십시오. 삶의 기적에 여러분이 무감각해지게 하지 마십시오. 항상 인간 육체의 놀라운 작동에 감탄하며 사십시오. 좋은 성적보다 그것에 더 초점을 두십시오. 성적은 여러분에게 어떤 의사가 될 것인지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병동에 들어서기 전에 인간성을 회복하십시오. 인터뷰 기술을 지금부터 닦아 낯선 이에게 말하기 시작하십시오. 친구와 얘기하고 잘못 걸린 전화에 대고 얘기하십시오. 우정을 가꿔 나가십시오. 저 뒤에 있는 훌륭한 사람들과 간호사들과도요. 그들이 가르쳐 줄 겁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매일 상대하고 피와 똥 사이를 헤쳐 나갑니다. 그들은 많은 지식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존경하는 교수님도요. 마음이 죽어있지 않은 분들은요. 그들의 연민을 함께 나누고 그걸 퍼뜨리십시오...."

"전 정말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 의사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만 또한 모든 걸 얻었습니다. 환자들과 병원 직원들의 삶을 함께 나눴습니다. 함께 웃었고 함께 울었습니다. 이게 제가 하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이 제 증인이신데 오늘 결정이 어떤 것이든 저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의사가 될 겁니다. 당신들에게 제가 졸업을 못 하게 할 힘은 있죠. 직위와 흰 코트를 얻을 수 없게 할 수는 있죠. 하지만 제 영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배우지 못하게 할 수 없습니다. 공부하지 못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선택하십시오, 제가 여러분의 열정적인 동료가 되게 하든지 아니면 솔직하고 단호한 외부자가 되게 하든지요. 어떤 것이든 전 가시와 같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 약속하죠. 없어지지 않을 가시입니다."


환자들과 병원 직원들의 삶을 함께 나눴습니다. 함께 웃었고 함께 울었습니다. 이게 제가 하고 싶은 겁니다.


주인공 패치의 연설 아닌 연설을 있는 그대로 옮겨 보았다. 이렇게 길게 옮긴 이유는 필자가 따로 부연설명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필자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그대로 대사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부연 설명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 15,000 명이 넘는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실존인물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다.

#8

어쩌다 보니 영화를 전반적으로 소개하게 되었는데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필자가 <영화로 풀어가는 죽음학 이야기>를 쓰는 것은 영화 소개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영화 속 장면들을 통해 죽음학에서 말하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같이 느끼고 생각해보기 위해서이다. 한 편의 영화가 죽음학의 메시지를 전반적으로 다루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라는 것이 인간의 삶을 다루는 것이어서 어떤 영화이든 90분 내지 120분이라는 상영시간 중 일부 장면과 대사는 죽음학의 메시지와 필연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죽음학의 메시지라는 것이 결국은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고 사랑과 용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죽음학의 메시지라는 것이 결국은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고 사랑과 용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 <패치 아담스> 처럼 죽음학의 메시지를 여러 상황과 대사를 통해 거의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가히 죽음학의 바이블과도 같은 영화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영화적으로 볼 때도 자칫 무겁고 지루할 수 있는 메시지를 아주 유쾌하고 유머러스하게 또한 깊이 있고 감동적으로 다루고 있다. 

졸업식에서 마지막까지도 장난기(?)를 잃지 않는 주인공 패치 아담스. 그는 유머를 통해 고통과 아픔을 치료하고 싶어 했다.

필자는 이 영화를 몇 번을 봤고, 이번에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보게 되었다. 보는 내내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1989년>가 떠올랐다. <패치 아담스, 1998년> 보다 10년 정도 먼저 만들어진 영화다. 나중에 따로 소개할 기회가 있을 텐데 두 영화를 관통하는 삶에 대한 공통된 메시지가 있다. 공교롭게 두 영화 모두 주인공역을 로빈 윌리엄스가 맡았다. 2014년 안타깝게 삶을 마감한 로빈 윌리엄스를 기린다.

퀴블러 로스 박사, 그녀의 삶도 왠지 패치와 닮아 있는 것 같다.

끝.

이전 15화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걸 깨닫지 못한 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